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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18 (완결)


BY 선물 2003-10-30

<그 후...도준>

고교 동창 친구로부터 우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아련도 선주를 통해 곧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도준의 입에서 우석을 꺼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련은 가끔 길을 걷다가도 멍해지곤 했다. 음악을 듣다가도,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지나간 영화들을 보다가도 그렇게 가끔씩 멍해졌던 것이다.
아련이 멍해졌을 때 그 눈빛 속에 누가 있는 지를 도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로만 생각하면서 그 눈빛을 참아 보기로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의 더께가 두텁게 쌓여 가도 그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눈빛은 점점 더 꿈꾸는 모습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도준이 더 이상 참아 내기에는 너무나 고역이었다. 그래서 도준은 우석을 떠 올리는 것들이 곳 곳에 스며 있는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로 이민 온 뒤에도 아련의 그 눈빛은 여전했다. 도준은 그제야 우석이 살아 있는 곳이 어떤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석은 바로 아련의 마음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래서 아련이 가는 곳에는 늘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련은 도준 앞에서 대 놓고 그런 눈빛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준은 그렇게 아련이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수록 오히려 더 화가 나고 마음을 다쳤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으면서 도준은 그 때 아련을 우석에게로 돌려 보내는 것이 옳았던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도준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미고 만다. 자신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고 아직도 변함없이 아련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왜 아련은 또 다른 옛 사랑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저리도 질척거리며 자신을 옹졸하게 만드는지 화가 났다. 그렇게 화를 내는 자신을 삭히느라 애쓰고 있던 어느 날 도준은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르며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언젠 가의 우석과 너무나 닮아 보였던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 하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은 분명히 우석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도준은 자신의 낡은 가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역시 낡은 수첩 하나를 가방에서 찾아 내었다. 수첩 속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무엇인가를 잔뜩 써 내려간 글귀들이 모여 있었다. 도준은 낙서같이 갈겨 쓴 그 글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 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준이 옛날에 우석을 만나 아련과 정리하게끔 하기 위해 자신이 우석에게 해야 할 말들을 미리 조목조목 적어 놓고 연습했던 글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아련씨를 사랑해야 한다....사랑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나의 사랑은 아련씨에게로만 길이 나 있다. 나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아련씨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다.'

도준은 지나간 그 글귀들을 읽으면서 그 때 우석이 과연 자신의 이런 이야기들에 정말 설득을 당했는 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보면서 조금은 우석을 이해하는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도준은 다시 주문처럼 그 글귀를 외고 또 왼다. 그리고 영원히 우석에게 떳떳해지리라 다짐한다.

도준은 자신의 눈 앞에서 넘어진 둘째 아이의 무릎 상처를 닦아 내고 있는 아련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여전히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이었다. 도준의 눈에는 아련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준의 사랑 안에서 그녀는 가장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추억 속에 박제 된 사랑 하나를 언제나 따끈따끈하게 떠 올릴 수 있는 그녀 또한 참으로 행복하게 보였음을 도준은 부정하지 않는다.

도준은 그녀의 행복을 더 이상 간섭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아련이 떠 올리는 우석은 이미 우석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석으로부터 비롯되긴 했으나 아련의 감성과 상상이 빚어 낸 아련 만의 우석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도준은 더 이상 허상에게 주눅 들지 않으리라 생각 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간직할 사랑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꿈꾸는 눈빛을 지닐 수 있는 아련이 훨씬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도준은 방으로 들어 가서 수첩을 다시 꺼낸다. 그리고 그 글귀가 적힌 페이지를 망설임 없이 쭈욱 찢은 뒤 꼬깃꼬깃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린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널 필요로 하는 일은 다시 없을 거다. 그리고 꿈꾸는 여자를 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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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해 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