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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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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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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9


BY 선물 2003-10-19

<아련 - 4>

아련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잠깐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 보던 아련은 잠시 자신의 방이 아닌 것에 놀라기도 했으나 소파에서 웅크린 채 잠자고 있는 도준을 보니 지난 밤의 일이 떠 올랐다. 순간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 아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밤 아련은 우석에게 전화를 걸고 난 뒤 정말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그를 이해 하려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이제는 도무지 용납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고 부족한 탓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전화로 또 한 번의 상처를 입고 보니 그녀의 마음에도 더 이상은 그럴만한 여유와 너그러움이 남아 있지를 않은 듯 했다.

아련은 점점 체념하고 싶어진다. 이제는 우석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아련으로 하여금 세상을 전부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끼게 했고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자존감마저 빼앗긴 느낌이었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워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련에게는 방이 빙글빙글 돌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 벨 소리도, 초인종 소리도 다 들었지만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누워 있는 사이 몸은 점점 더 떨려 왔고 얼마 뒤에는 의식조차 가물가물해 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쯤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고 나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야 그 사람이 도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사를 맞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 난 아련은 도준에게 의지해서 오피스텔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준의 도움으로 침대에 눕혀진 아련은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는 시골집이 자주 등장하였다. 그리고 늘 어릴 때 친구들의 모습이 함께 하였다. 그런데 꿈 속에서 함께 놀고 있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련만 혼자 남겨져서 두려움에 울고 있으면 누군가가 다가와서 아련을 꼭 안아주고 감싸준다. 그 가슴이 얼마나 따뜻한지 아련은 그 품에서 벗어 나기가 싫다. 가끔씩 그 비슷한 꿈을 꾸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따뜻한 사람은 어김없이 나타나서 아련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깨어나서 생각해 보면 어쩜 아버지를 뵌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물론 아버지도 아련을 무척 귀여워 해 주시고 아끼셨다고 한다.아련이 가진 몇 장 안되는 아버지 사진을 꺼내 보면 자신이 아버지를 무척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그런 그리움 때문인지 아련은 꿈 속의 남자를 자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난 밤에도 아련은 아버지를 느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자신을 떠나 가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껏 아버지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꿈에서는 이상하게 힘이 써지지를 않았다.

아련은 자신이 약해질 때마다 생각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자꾸 그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버지만 계셨어도 지금처럼 자신의 양 어깨에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아련은 그동안 우석으로부터 그런 아버지의 부재를 위로 받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한낱 스쳐 지나간 환상이었을 뿐이란 생각에 서늘한 가슴이 되고 만다.

아련은 곤하게 잠든 도준을 바라 보았다. 참 고맙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날이 밝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도준은 조금 더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련은 도준에게 남길 쪽지 한 장만을 급하게 쓰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회사 출근이 바빴던 것이다.

<선주 - 4>

"이거 너 주려고 갖고 왔어. 얼른 가방에 넣어."
점심을 먹다 말고 선주가 아련에게 밑반찬 몇가지가 든 반찬통을 건네 주었다.
"너도 힘들텐데 왜 이러니? 나한텐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별거 아닌데 뭘...그리고 정말 니 말처럼 신경 안써도 될만한 얼굴을 하고 다녀라. 제발... 딱 반 쪽인 얼굴모양을 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니?"
"너한테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서 그러지. 그리고 실은 어제 저녁에 좀 아팠거든...그래도 다행히..."
"정말이야? 많이 아팠니?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야?"
선주의 걱정스런 물음에 아련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 말고 오히려 선주 동생 안부를 묻는다.
"응, 동생은 그만 그만 한 것 같아.아직 얼마간은 병원에 좀 더 있어야 하나 봐. 근데, 아련아, 하나 물어 볼 게 있는데..."
"무슨?"
"실은 네가 우석씨 만난 뒤로 너무 기운이 없어 보였거든. 그래서 걱정이 되어 어제 오빠한테 연락해 봤는데...혹시나 우석씨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게 있나 싶어서...그런데 그 날, 왜... 네가 우석씨 만나고 왔던 날 있잖아, 그 때 우석씨가 오빠한테로 찾아 왔었나 봐."
"도준씨한테?"
"응,근데 우석씨가 그랬대. 자기는 부모님 허락까지 받아내면서 너를 위해 노력하는데 너는 아닌 것 같더라고...난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더라. 진짜 어떻게 된 건데?"
"아니야. 오빠는...참, 오빠라는 말도 못하게 하더라. 교양 없다고...어쨌든 오빠 마음이 돌아섰어. 막상 결혼 하려고 보니 내가 부끄러워진 거야. 이젠 내 전화까지 피하는 걸, 뭐...실은 어제까지도 연락을 기다렸거든..그래도 이렇게 끝날 것으로는 생각 안 했으니까...근데, 정말 이젠 아니야. 내가 무엇보다 속 상한건 오빠가 나를 이렇게 비참한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는 게 너무 속상해..."
울먹이는 아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 끝나기야 하겠어? 너한테 좀 서운한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 걱정 말고 둘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한 번 해 봐! 응?"
"아니야. 느낌이라는 게 있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이젠 정말 끝났다는...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일도 분명히 있었고...선주야, 이제 그만할게. 좀 힘들거든..."
아련은 긴 함 숨을 내 쉬며 괴로워했다.
"아련아,만약에 말야...네가 우석씨랑 잘못 된다고 해도 어쩜 그게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너한텐.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우석씨같은 사람이 얼마나 피곤한데...여자란 편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한거야. 두고 봐, 훨씬 좋은 사람이랑 만나게 될 테니까..."
선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어떤 위로라도 해 주고 싶었다.
"선주야, 이젠 정말 그만하자. 나 너무 복잡해."
"알았어, 어쨌든 기운이나 차려, 제 때 제 때 챙겨 먹고."
아련의 등을 두들겨 주는 선주도 마음이 착잡해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