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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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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3


BY 선물 2003-10-04

<선주 - 2>

아련이 그 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선주가 도준과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늦은 시각이었다. 도준과 특별한 만남을 다시 약속하지 못하고 돌아 온 선주는 내심 아련과 우석이라도 계속 연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되면 선주 또한 도준과 다시 자연스럽게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준이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함께 합석하자는 제의를 해 왔을 때 선주는 머뭇거리는 아련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선주의 테이블이 2인용 테이블이라 자리를 비워 주고 자신들과 합석하면 연말이라 붐비는 사람들로 자리가 부족한데 그것을 양보하는 미덕을 베푸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며 애교스럽게 말을 건네는 도준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긴 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우석이 아련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주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홀린 눈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눈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아련을 바라보는 눈길은 우석의 눈길 하나만이 아니었다. 도준 역시 아련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석처럼 넋을 잃은 눈빛은 아니지만 분명히 호감을 가득 담은 눈빛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아련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옆에 있는 선주의 존재는 별로 의식을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것이 선주에겐 결코 불쾌한 일로 느껴지질 않는 것이었다. 질투의 감정이 생길 만도 한데 그런 감정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했다. 어쩜 그것이 아련의 힘든 삶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선주 자신도 아련에 대해 연민이라는 이름의 사랑의 색깔을 띤 감정으로 바라보게 된 까닭인 지도 모르겠다.

 

직장 동료로서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아련이 연락도 없이 결근을 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아련의 집을 직접 다녀 온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산동네 꼭대기 어느 허름한 문간방에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고 했다. 멀쩡한 사람도 그 춥고 퀘퀘한 방에서 며칠만 지내면 병을 얻을 것 같았다는 말도 덧붙여 해 주었다.

 

 예쁘고 착한 아련의 모습에서 어둠이 느껴졌던 것이 바로 가난의 그림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선주는 간신히 몸을 추스리고 나온 아련에게 자신의 자취 방에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밤을 무서워 하니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함께 지내면 훨씬 든든할 것 같다는 말로 아련의 동의를 구해낸 선주는 함께 사는 조건으로 아련의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제시하였다. 그 때문인지 아련은 돈을 아끼게 된 그 만큼 몸은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려 애썼다. 그런 아련이 안쓰러워 그러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아련은 그냥 자신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라며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선주는 아련의 마음을 아프게 받아 들였지만 더 이상 말리지는 못했다.
남남이 함께 산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인데 선주와 아련은 서로 참고 양보하며 호흡을 잘 맞추어 나갔다. 아마도 그것은 선주에 대한 아련의 감사해 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주가 홀로 집을 나와 살게 된 데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집에서는 아마도 새엄마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지만 실상 선주의 마음 속에는 새엄마에 대한 불만이 별로 없었다. 굳이 밝히자면 오히려 새엄마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는 것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사실 새엄마보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더 많은 선주였다.

 

선주가 중학교 1학년 때 시름 시름 병을 앓던 엄마가 돌아 가셨는데 그 뒤 1년도 채 못 되어 아버지가 재혼을 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선주에게는 어떤 의견도 묻지 않은 채... 더구나 한참 사춘기를 겪으며 마음의 방황이 시작될 그 당시에는 새엄마라고 하면 신데렐라판 계모의 모습으로만 생각될 때라 미리부터 거부하는 마음이 가득했었다. 그런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선주는 정말 처절하게 실감하였다. 새엄마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도 위선 같아 보기 싫었고 조금이라도 언짢아 하는 모습을 보이면 역시 계모는 다르다는 식으로 단단한 벽을 만들어 밀쳐 낼 궁리만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가끔씩 안방에서 흘러 나오는 흐느낌이나 발갛게 충혈된 눈자위를 애써 감추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한 번쯤이라도 손을 내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늘 그것과 반대의 모습일 뿐이었다. 새엄마가 데려 온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는 오히려 선주를 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라 주었는데 그 아이만 보면 괜히 미안해지고 마음이 짠했던 것이다. 그것은 새 엄마가 드러나게 선주를 더 위해 주려는 과정에서 남동생이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기 때문이었는데 새 엄마가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 지금까지도 그 동생은 늘 선주를 잘 따르는 편이다.

 

취직을 하면서 따로 독립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새 엄마는 정말 서운해 하며 많이 울었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담담해 하시는 것 같았다. 끝까지 마음을 열어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새엄마도 선주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실 것 같았다. 혹시라도 텔레비젼에서 왜곡된 시각으로 계모의 모습을 좋지 않게 묘사할 때가 있으면 그 때마다 선주는 딴청을 부리면서 다른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리곤 했는데 그것을 눈치 챈 새엄마가 살며시 다가 와서 선주의 손을 꼬옥 잡고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선주는 그 어색함이 싫어서 손을 뿌리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이미 자신의 그런 마음을 다 들켜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냉정하고 지극히 이성적인 아버지가 미워서라도 절대로 따뜻한 모녀간의 모습으로 비칠 일은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꾸 상처를 입을 새엄마가 안쓰러워 차라리 독립을 하리라 마음 먹은 것이다.

처음 선주가 우석을 보았을 때 잠깐 숨이 멎는 듯이 느껴졌던 것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버지보다 훨씬 잘 생기고 멋져 보이기는 했지만...그러나 도준은 털털해 보였고 상대방을 많이 배려하는 사람으로 보였다.테이블을 옮기게 하면서도 선주네의 마음을 보살폈고 잠깐동안 함께 했던 시간도 내내 그렇게 선주를 편하게 해 주었다. 다만 어느 선 이상은 절대 마음을 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행동하던 것은 선주의 마음을 좀 불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