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 - 1>
우석의 차를 겁없이 탈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잠깐동안의 짧은 만남일 망정 더할 수 없이 선해 보이는 인상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고 아련은 마음 속으로 변명한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우석의 눈빛이 왠지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며 오히려 끌리기 시작했고 또 자신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훌륭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보여 조금은 긴장을 풀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 만남에서 식사를 같이 하면 그 사람과는 이루어지질 않는다는데 어떡하지요? 배는 고픈데..."라며 씨익 여유롭게 웃는 우석 앞에서 아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발그레 붉어졌다.
"그럼 우리 식사를 하지 말고 군것질이나 할까요? 괜찮겠어요?" 하며 다시 의견을 묻는 우석에게 아련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아련씨도 저랑 이루어지기를 원하나 보네요. 식사 대신 군것질이 좋다는 것을 보니...그렇지요?" 아련은 점점 짖궂어지는 우석이 어느새 편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랑 오뎅꼬치 등으로 식사를 대신한 두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가서 서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정식으로 하게 되었고 아련은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한다는 우석의 명함을 건네 받게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힘들게 혼자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와 아직 어린 동생들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는 아련은 서울에 사는 친척 분의 소개로 일하게 된 조그마한 무역회사의 경리를 보며 받고 있는 적은 액수의 월급마저도 거의 대부분을 시골에 보내면서 힘들게 생활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석 앞에서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아련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처지를 너무나 담담하게 다 드러내었고 우석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지한 모습으로 귀 기울여 들어 주고 있었다. 자취방 얻는 돈조차 아까워서 새엄마랑 살기 싫다며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직장 동료인 선주의 방에 얹혀 살다시피 하는 자신의 궁색한 생활을 이야기 하던 아련은 그 동안 자신의 자그마한 한 몸이 헤쳐 나가야 했던 고단한 삶을 모두 위로받으려는 사람 마냥 끝없는 하소연을 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련은 갑자기 우석에게 마음을 털어 놓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그저 하루동안 시간이나 같이 보내려고 다가 온 사람일 뿐인데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며 이렇게 첫 만남에서 헤픈 여자처럼 행동 했는지 수치심까지 드는 것이었다.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할 것 같은 이 근사한 남자 앞에서 참으로 쓸 데 없는 가벼움을 보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헤어지며 연락처를 묻는 우석 앞에서 더 이상 초라해지기 싫은 마음이 들어 자신이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씁쓸한 기분으로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석 - 2>
우석은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끝내고 침대 위에 그대로 드러눕고 말았다. 여태까지 참으로 많은 여자들을 대해 왔지만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도 흔들린 적은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황홀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귓 불 아래로 하얀 솜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해 보이는 어린 소녀 같은 아련이 자신의 고단한 삶을 담백한 눈 빛으로 또박또박 털어 놓던 모습이 계속 눈에 선하다. 그 가녀린 여자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우석에게도 느껴져서 정말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 냈다. 그녀에게 연락처를 묻고 다시 만나기를 청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연락처는 알려 주지 않은 채 우석의 연락처로 자기가 먼저 연락 하겠노라고만 이야기 하고는 뒤돌아서서 총총히 사라져 가는 그녀를 차마 더 이상 붙들지 못하고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서 꼭 연락이 오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석이 아련과 만난 날로부터 꼭 일주일 째 되는 날 드디어 아련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젠가는 연락이 오리라는 기대는 계속 갖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기다림은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다시 만나게 된 아련은 우석의 환한 낯빛을 본 뒤에야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을 활짝 펴는 것이었다. 아련은 자신을 혹시 귀찮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많이 불편했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래, 너 때문에 내가 일주일동안 마음 졸이며 기다리느라고 너무 귀찮았다' 하면서 장난스레 원망하고 싶었으나 잔뜩 긴장한 가엾은 작은 얼굴을 대하니 그냥 푸근하게 감싸 주고 싶은 마음만 생길 뿐이었다.
우석은 비록 아련이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이고 아직은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아가씨이기는 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대견한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취직을 한 뒤로 집에서는 자꾸만 그럴듯한 집안의 아가씨들과 선을 볼 것을 종용하기 시작했는데 아련을 만날수록 결혼을 염두에 두게 되었고 부모님의 당연한 반대를 떠올리면 미리부터 마음은 무거워져 왔다. 비교적 자식욕심이 많고 체면을 중히 생각하시는 부모님께 아련은 신부후보 감으로도 인정되지 않을 그런 위치의 아가씨로 보일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언제나 믿어 주시는 부모님께 정말 마음을 다하여 천천히 설득하리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도준 - 1>
그 날 호프 집에서 우석을 기다리던 도준은 앞 테이블에서 친구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한 여자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까르륵 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 가신 뒤로 한참을 방황하던 중에 만난 희진이라는 여자를 겪은 후로는 그 어떤 여자와도 마음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도준이었다.
도준에게 희진이라는 여자는 그저 허연 살덩이라는 느낌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참동안 도준을 길들이던 그녀의 몸은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자 한 치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도준을 훨훨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도준과 사랑을 나누는 그 동안에는 몸과 마음 모두를 아낌없이 도준에게 주었고 깊은 외로움에 젖어 있던 도준에게 그런 그녀는 어머니처럼 푸근하게 기대고 싶은 그런 사랑이었던 것이다. 후에 알았지만 그녀는 도준에게 오기 전에도 남자가 있었고 도준을 떠나서도 계속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며 탐닉하는 사랑을 갈구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을 그녀의 타고 난 운명으로 이해하고 나니 도준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 졌으나 그래도 여자라는 존재가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그 뒤로는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매력을 느낄 수 없었던 도준에게 그 날 본 아련이라는 여자는 큰 충격처럼 도준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석과 함께 한 자리에서 도준은 아련에게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이는 우석을 눈치 채고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우석을 별다른 거부감없이 그저 수줍어 하기만 하는 아련을 본 뒤 자신의 가슴에다 잠시 숨결을 훔쳤던 그녀를 미련없이 탁탁 털어 내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잠깐이라도 여자의 마음을 다시 원했던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도준은 어쩌면 다시 사랑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석과 아련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곁에 있던 좋은 인상을 가진 선주와 기꺼이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