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 씨. 잘 있었어요?
-과장님도요. 우리 바로 홍성가지 말고 어디 들릴래요?
-어디요? 오다가 생각했는데요. 공주 쪽에 들렸다가 청양 거쳐서 홍성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공주 쪽에 마곡사라고 절 있거든요. 거기 갈래요?
-네. 가요.
공주로 가는 길은 주변이 울긋 불긋 물든 산이 너무도 아름다워 승희와 석준은 연신 환호를 질러댔다. 도심이나 일상에 많이 찌들고 힘들수록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듯 있는 자연이다.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그런 아무런 말도 없는 산을 한번 보고 나면 가슴 한 켠이 시원해 진다. 승희와 석준은 마곡사로 향했다. 추석 연휴였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다지 쌀쌀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산으로 들어갈수록 한기가 느껴졌다. 어묵과 우동으로 얇게 걸친 옷을 통해 전해지는 한기를 달랬다. 정말 맛이 없나보다. 맛이 없다는 듯이 서로 음식 맛을 보더니 속삭인다. 승희와 석준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마곡사의 본당까지 갔다 오면서 그리고 비구니들을 보면서 신기해 하기도 하고 옆에 커플 인 듯 보이는 연인들을 보면서 안 어울린다는 둥, 남자는 어떻다는 둥의 농담과 우스갯 소리를 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청양을 거쳐 홍성으로 향했다. 홍성으로 향하는 동안 거의 말이 없었다. 아직은 승희나 석준은 어색하기만 하다. 사귀는 사이이기는 해도 왠지 어색은 느낌이 아직은 흐르는 모양이다. 홍성에 도착 한 그들은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끼니를 거를 수가 없어 직원들과 자주 가던 ‘치마 저고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옆에 있는 호프 집에서 간단하게 한잔을 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석준이 은근 슬쩍 승희의 허리에 손을 얹어 보려고 했으나 승희가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석준은 승희와 간격을 두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승희가 석준에게 자신의 집에서 한잔 더 하자며 제의를 했다. 석준은 기꺼이 응했다. 추석연휴라 그런지 홍성 시내와 승희의 집 주변은 한산한 편이었다. 맥주를 사서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비워낸 맥주병만 지금 7병인 것 같았다. 승희는 점점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가 힘이 들었는지 무릎을 세워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승희 씨. 이젠 과장님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해요? 오빠라고 해요.
-당연하죠. 회사에 있을 때나 과장님이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건 아는데요. 아직 덜 익숙해서요. 나중에 시간 지나면 알아서 오빠라고
하겠죠. 그러면 오빠도 저한테 말씀 놓으세요. 제가 오빠 여 동생 분보다도 나이가
어리잖아요.
-알았어. 그럼 너도 말 놔.
-그건 안돼죠. 제가 나이가 5살이나 어린데요. 그건 더 친해지면요.
-그래...승희야. 너 괜찮니?
-저요?! 당연히 괜찮죠. 이 정도 가지고 뭘요. 과장님. 저야 잘래요. 졸려요.
자야겠다면 일어서는 승희가 비틀거리자 석준이 바로 일어나 부축을 해준다. 석준은 승희를 침대에 바로 눕히다가 승희를 안고 침대로 허리를 숙였다. 승희를 가까이서 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승희를 향해 입맞춤을 했다. 술에 취한 승희는 순순히 석준의 그런 행동들을 받아들였다. 승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었다. 옆을 돌아보니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체 웃옷을 벗고 자고 있는 석준을 보았다. 승희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그리곤 이내 승희는 아무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승희는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할 수가 없었다. 석준과 반대편으로 등을 돌린 체 승희는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잠만 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석준이 뒤척이더니 일어났다. 그리곤 서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워만 있었다. 승희는 어제의 실수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석준이 무슨 얘기라도 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석준은 승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듯 뒤로 등을 돌린 승희를 끌어안았다. 승희는 일어났냐며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상체를 일으킨다. 석준은 승희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일어나 승희를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했다. 이에 반응하지 않는 승희를 보자 석준은 더욱 강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승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는 어쩔수 없는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승희는 석준의 팔베개를 하며 석준을 끌어안고 있었다. 남녀 사이는 작은 스킨 쉽 하나하나를 통해서 더욱 친밀해 진다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좀더 발전을 위해서 작은 스킨 쉽은 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빠. 배 안 고파요?
-고프긴하다. 우리 나가자.
-뭐 먹을건데?
-닭갈비 먹으러 갈까?
승희는 서둘러 씻고 석준이 씻는 사이 자신은 이불과 침대 한 구석에 박힌 자신의 옷을 꺼내어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한다. 둘 사이의 그런 관계가 있고 난후 급속도로 발전 했다. 승희와 석준은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 줬다. 승희는 석준의 건강이 걱정되어 수시로 그의 혈당이며 약 잘 먹고 있는지를 확인했고 기분파인 승희의 성격을 맞추기 위해 석준이 노력을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또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맞춰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오빠 나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다.
-무슨 얘기야?
-어우. 어제 노부장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라고. 사양가하고 술 마신 것 같았어.
-그런데.
-그런 얘기 하더라. 저번에 나 농협 것 때문에 노부장도 입장이 좀 난처했잖아요. 그러면서
홍성영업소에 여직원 한명만으로 충분히 끌고 갈수 있다고 자신있다고 그런 얘길
하더라구요. 왜 갑자기 그런 얘기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술 마시고 하는 얘기어도
그렇지 그런 얘길 듣고도 어떻게 회사를 다녀요.
-야. 노부장 미친놈 아냐? 다 끝난 얘길 가지고 왜 다시 들춰낸데?
-몰라. 그래서 나도 어차피 신희하고 맞지도 않고 혼자 지내는 것도 힘들고 또 아빠가 그냥
천안으로 오라고 하셨었거든. 그래서 이번에 그만 두려고.
-그럼 난 어떻게 하고?
-오빠가 왜?
-너 천안에 가면 언제 만나? 언제 얼굴 봐?
-주말 마다 만나면 돼지. 내가 가던가 오빠가 오던가. 별 걱정을 다해.
-그럼 너 같으면 걱정 안들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주말마다 만나다가
힘들면 한 달에 두어 번 만나다가 몇 달에 한번 씩 만나고 그러다가 멀어지는거야.
-아이고 별 걱정을 다해요. 내가 오빠한테 자주 가면 되잖아.
-아휴. 몰라. 네가 알아서 결정하겠지.
-내가 그만 두는 거 싫어? 그러면 내가 매일 신희랑 말도 안하면서 서로 어색하고 불편하게
지내고 노 부장한테 눈칫밥 먹으면서 회사 다닐까? 그랬으면 좋겠냐?
-그런건 아니고. 그럼 언제 그만 두려고?
-마음 같아선 당장 그만두는데 12월 말에 보너스도 있고 해서 그거 받고 그만 둬야지.
-이 대리님한테 먼저 얘길 해야 할 것 아냐.
-이 대리님한텐 이미 얘기했어요. 12월 까지만 있겠다고. 노 부장 얘기도 했고.
-이 대리님이 뭐라는데?
-뭘 뭐라고 하시겠어. 내가 결정 다 내리고 통보하는 식이었는데. 이 대리님이 노 부장한테
얘기하겠지
-그런데 점심 시간인데 점심 안 먹고 뭐해?
-오빠랑 통화하잖아
-가서 밥 먹어. 왜 매일 혼자 뚝 떨어져서 그래. 그러니깐 네가 여기에 적응 못하는 거지
-싫어. 나 원래 점심 안 먹어. 별로 입맛도 없고. 오빤 밥 먹었어?
-아직. 먹어야지 그런데 소장이 삐져서 미치겠다.
-밥 먹어야 약이라도 먹지. 아침도 라면 먹고 갔잖아. 밥 할걸 그랬다. 귀찮아서 안했는데
-밥은 무슨 같이 라면이라도 먹은 게 다행이지. 혼자 있으면 라면도 못 챙겨먹잖아
-소장님하곤 왜 그런데?
-몰라. 저번에 그 피그뱅크 건도 아직 해결 안 됐고, 지금 소장 2개 사료 취급하겠다고 하면
서 사무실에 앉아서 전화만 하면서 가만히 있어. 아마도 며칠 전에 다른 회사 지역과장하고
접촉이 있었던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사모가 얘기해 주는데 태양사료 알지! 거기서 1억까지 지원해주겠다며 지금 계속
찾아오나봐
-설마 소장이 1억에 가겠냐? 그리고 말이 지원이지 그 1억이 결국 자기 부채 아냐.
-그렇긴 한데 우리 회사가 지금 지원 안 해주니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나보다.
-설마. 아무리 소장이 생각이 없는 사람이어도 자신 빚 늘려가서 다른 회사로 옮기겠어?
나 같으면 차라리 여기에 있겠다.
-승희야. 이따가 전화 할께. 소장 나왔다.
-응. 오빠 밥 하고 약 꼭 챙겨 먹어.
승희는 몇 달전에 있었던 농협 업무와 관련하여 윗사람인 노현묵 부장으로부터 자신을 불신임을 하는 말을 들었다. 무척 힘들어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홍성까지 와서 고생하는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준에게는 다 말하지 못했다. 승희와 석준 사이의 대화는 거의 정해져있었다. 석준의 하루 일과들과 소장이나 기타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거의 전부였으며 승희가 석준에게 늘어놓는 푸념들은 석준이 듣기에는 어린 아이가 밥 투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는 수없이 답답한 마음에 경선에게 전화를 하여 이런 저런 상담을 하곤 했다. 기분파여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승희는 경선의 말들이 석준의 말보다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 결국 승희는 12월 말일자로 한국사료를 그만두게 되었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회사였다. 항상 승희가 힘들었던 것은 신희와의 껄끄러운 관계였다. 신희 역시 성격은 착하다. 하지만 업무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무조건 자기는 아니라는 식으로 나오는 신희의 말 앞에 승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설사 말을 한다 해도 개미소리로 말을 하곤 했다. 왜 그런지 승희는 홍성에서 자신이 없었다. 친구하나 없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석준 밖에 없는데 석준 역시 몸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탓에 항상 민감한 상태였었다. 승희는 어쩔 수 없었다. 석준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사귀기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승희는 회사를 그만두고 바로 천안으로 짐을 옮겨 이사를 왔다. 이사하는 마지막 날 석준은 바빠서 오지 않았다. 승희는 그런 석준을 이해하려 했으나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승희와 석준의 티격 태격하는 사소한 싸움이 시작 된 것 도 그때부터였다.
작년에 천안영업소에 근무했었을 때 파워 포인트를 알려주었던 채현민 과장으로부터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어머! 과장님 왠일이세요?
-승희 씨. 회사 그만 뒀어요?
-네. 모르셨어요?
-아니 언제? 왜?
-저번 달 말일자로 그만 뒀어요. 과장님 너무하시네요. 같이 일했던 사람이 그만두는 것도
모르시고요.
-나야 천안에 있으니깐 잘 모르지. 나도 방금 홍성에 승희 씨 한테 물어볼 것 있어서 찾았
더니 그만 뒀다고 해서 이렇게 전화한거에요. 아니 이 좋은 회사를 왜 그만 뒀데.
-그냥 홍성하고 좀 안 맞아서요. 그런데 왠일이세요?
-왠일은? 그때 내가 저녁 사준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전화했지. 오늘 시간 어때?
-오늘 괜찮죠. 그런데 과장님 사모님 아시면 뭐라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와이프가 왜 뭐라 그래. 회사에 근무했었던 여직원하고 저녁 한 끼 같이 먹는건데.
-그래도요.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시면요. 요즘 그런 것 좀 많잖아요. 그럼 어디서 만나요?
-집 앞으로 갈께. 저번에 내려줬던데 거기로 가면 되지? 그리고 내가 출발 전에 전화해 줄께.
채현민 과장은 다소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실제 나이는 31살이었으나 얼핏 보기엔 28살 정도로 보일 만큼 작은 체구와 동안이었다. 채현민 과장의 흠이라면 회사 내에 떠도는 안 좋은 흠들이었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좋은 루머들이 지역과장들 사이에 돌고 있었기 때문에 승희 역시 개인적으로 만나기가 꺼려졌으나 같이 저녁 한 끼 먹는 것이 대수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승희가 채현민 과장과 저녁을 먹는 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채과장은 승희에게 혹시라도 사적으로 만나게 되면 오빠라고 부르라는 말도 했다. 물론 승희는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며 넘어갔다. 마침 걸려온 석준의 전화였다. 하지만 승희는 받을 수가 없었다. 지역과장들 사이에서 석준과 자신이 사귀는 것도 비밀이었지만 만일 자신이 채과장과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을 안다면 석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석준의 전화가 스무 번도 넘게 왔다. 11시 넘어서 집에 들어온 승희는 다짜고짜 소리 먼저 지리는 석준의 전화를 그제서야 받았다.
-야! 너 누구 만나고 왔어?
-나 친구.
-친구. 누구? 친구 만나는데 전화를 못 받아? 내가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내 친구 오빠가 다 알아? 내 친구 하나도 모르잖아. 같이 만나자고 해도 만나지도 않으면서
수정이라고 있어.
-너 그 친구 만난 거 아니지. 딴 놈 만났지. 딴 놈 만났으니까 전화도 안 받지.내가 몇 십번도
넘게 했어. 그런데 아깐 전화도 아예 꺼 넣고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내가 딴 사람 만났다고? 수정이 한테 전화해 볼래? 수정이랑 심각한 얘기하는데 오빠 전화
받고 있어야 하냐? 내가? 믿기 싫으면 믿지마. 믿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믿게 하고
싶지도 않아.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그렇게 생각해. 난 아니니깐.
-아니라고? 그럼 전화 안 받고 핸드폰은 왜 껐다가 다시 켜냐?
-내가 아까 말 했잖아요. 친구가 하도 심각한 얘기했고 난 핸드폰 진동으로 했는데 가방에
넣어 놔서 전화 오는 줄도 몰랐어요.
-거짓말 하지마. 내가 너 성격 다 알아. 잠시라도 손에서 핸드폰 못 놓는 애가 무슨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진동으로 해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솔직히 얘기해 너 누구
만나고 왔어? 너 남자 만나고 왔지?
-아휴 맘데로 생각해요. 지겨워. 그래 나 남자 만나고 왔어요. 이제 됐어요?
-뭐야.
-진짜 수정이 만나고 온 거에요. 수정이 지금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때 정말 오빠
전화 받을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저녁은 먹었어요?
-너 말 돌리지마.
-내가 오빠 말고 딴 사람 누굴 만나요. 별 걱정을 다해. 지금까지 뭐해요? 안 자고
-너 때문에 속이 타는데 잠이 오냐?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께요. 내일 출근 하려면 빨리 자야죠.
-자야지. 이 기분으로 어떻게 잠이 와. 너 진짜 딴 놈 만난거 아니지?
-아니에요. 정말로. 오빠 말고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알았어. 그리고 내일 전화 해줄래?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 부여에 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럴께요. 그럼 7시 30분에 깨울게요.
-경선! 바빠?
-아니? 어디야? 회사
-어. 지금 혼자 있어. 다 나갔다. 여기 회사가 하도 작아서 좀 이상하다. 적응이 잘 안 된다.
-네가 작은 데 처음 있어봐서 그럴꺼야. 좀 지나면 괜찮아질꺼야.
-야! 나 어제 누구 만났는지 아냐?
-이과장님? 평일에도 만나?
-아니. 채현민 과장님 알지! 그 사생활 좀 지저분한 과장 있잖아.
-채과장? 왜?
-그때 내가 예전에 천안에 있었을 때 도와준 게 있는데 그거 고맙다고 하면서 이제와서 밥
산다고 어제 전화가 왔더라고 나 회사 그만둔 거 몰랐다나? 그래서 어제 그 사람 만나서
밥 먹고 왔지.
-둘이만 만났냐? 뭐 했어?
-그냥 둘이서 밥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했지. 그런데 그 과장님이 나 보고 사석에서 만날
때는 자기 보고 오빠라고 부르란다. 나한테 작업 들어오나봐. 미쳤나보다.
-야. 그 사람 만나지마. 그 사람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왜 나가냐? 네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나갔지. 밥이나 잠깐 먹을 생각이었지. 결국엔 그거 때문에 울 오빠랑
싸웠다. 오빠가 얼마나 의심하던지 정말 미안하더라. 거짓말해서 더 그렇지.
-그러는 거 아니다. 거짓말은 왜 했냐?
-안 그러면 오빠 난리 친다. 내가 채과장 만난 것 알면 아마 나 죽일껄?
-알면서 만나는 너도 참 용하다.
-그냥 잠깐 만난건데. 뭐.
-그 사람 좀 그렇면이 있다면서 다음에 또 전화하면 만나지 말아라.
-안 만나. 그런 얘기 할줄 알았으면 만났지. 그런데 잘 있는거야? 회사 그만두고 한 번도 못
만났네.
-그러게나. 인희는 잘 있다니? 한번도 연락 못했다.
-인희 씨! 어 잘 있다고 하던데 말하는 건 여전하더라구. 목소리 듣기 좋더라.
-인희는 이과장님하고 너 사귀는 아니?
-다 알아.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 그런데 오빠 주변 사람들이 날 몰라서 그렇지.
-왜? 이과장님 주변사람들이 너 몰라? 친구들도?
-아마 모를꺼야. 내 얘기 안 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
-그래? 이상하다. 대부분 남자들 여자친구 생기면 자기들 친구한테 자랑하지 않냐?
-몰라. 오빠가 얘기 안하니까 좀 신경이 쓰이기는 하는데 거기다가 왜 오빠 친구들한테 나
소개 안 시키냐고 뭐라 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있는거지
승희가 회사를 그만 두면서부터 석준 과의 잦은 말다툼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른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말이 되어 서로의 만남을 가질 시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한 연인 사이로 돌아왔다. 그들이 서로 사귄지도 어느 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승희가 한국 사료를 그만둔지 3개월이 지났다. 다른 여느 커플들은 만나는 날을 기념을 하거나 그들의 사랑을 이어줄 커플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승희와 석준은 그런 것들에 대해 전혀 말이 없었다. 여자는 자기 동성친구들이 커플링이라며 자랑하는 것 보면 자신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곤 한다. 승희 역시 그런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악세서리를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 석준에게 굳이 커플링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백일이며 이백일 챙기고 할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희라고 여자가 아니겠는가. 한번쯤은 멋진 기념일을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역시 석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오늘이 ‘우리 백일이야’‘내일 모레가 우리 이백일이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석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있지 못해 승희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는 못했지만 자신의 얘기를 통해서 승희와 많은 대화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석준이 승희에게 얘기를 하면 승희는 석준의 기분은 생각하진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걸 그대로 얘길 해서 석준의 행동은 화를 내곤 했었다.
-오빠 어디야?
-영업소
-왜 지금까지 영업소야?
-내일 본부장님이 홍성에 오신다고 해서 자료 만들고 있어.
-무슨 자료?
-아휴. 몰라. 내일 본부장 오는데 부여, 서천, 웅천 물량 안 늘어나는 것 어떻게 할껀지. 자료
만들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게 내 마음데로 되는거냐고
-대책 발표 자료 만드는거구나. 노 부장은 뭐라는데?
-몰라. 그냥 다 작성하고 출력해서 자기 자리에 놓고 가래. 아침에 와서 검토한다고.
-노 부장은 그게 뭐냐? 아랫사람이 그런 때문에 고민하고 하면 옆에서 좀 도와주던가 하지.
-됐어. 노 부장 있다고 해서 뭐 잘 되냐? 내가 못 하는건데.
-오빠가 영업이라는 걸 왜 하는데? 영업이라는게 그런 걸로 평가하는 거 아냐? 다른 사람이
우리 것 안 쓸려고 하면 오빠가 어떻게 든지 해서 우리 것 쓰게 하는 게 영업 아냐? 왜 오빤
그걸 못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냐? 일 좀 해볼려고 하면 소장 삐지지.
회사에 요구 사항 제출하려고 하면 노 부장이 막지.
-난 오빠가 이해가 안 간다. 그러면 노 부장하고 얘기하지 말고 본부장하고 얘기해봐
-노 부장 안거치고 어떻게 본부장하고 얘길 하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솔직히 노 부장이 지금껏 오빠 앞에서 일일이 가로막고 있잖아. 오빠가
제안 한 것 제대로 된 것도 없고. 난 한번 쯤은 본부장하고 상의를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본부장한테 가서 오빠가 노 부장 고자질 하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지금 가장 고민
하는 게 부여 대리점 아냐? 소장하고 틀어지는 것도 그렇고 이런 때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그렇게 물어보면 본부장이 거기다가 데고 뭐라고 할 사람도 아니잖아.
-아냐. 넌 몰라.
-그럼 말고. 왜 맨날 혼자 끙끙 앓냐? 그런 다고 해결 되냐?
누가 그러더라 모든 문제들 준에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바꿀 수 없다고.
문제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인한 고민이라면 그런 건 고민의 의미가 없데. 오빠가
우선적으로 바꾸라고. 노 부장이 자꾸 앞에서 그러는 건 오빠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냐?
-그런 건 아는데.
-알면서 왜 못해? 그러면 오빠가 이상한거야. 노 부장이 그러면 오빠도 다른 방법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 할 줄 알아야지. 누가 오빠 문제 일일이 다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답답하게 그게 뭐야.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해.
-넌 도대체가 본부장도 너랑 같은 얘길 하는데 본부장이 얘길 하면 ‘아 그래야 하는구나’하고
깨닫는데 네가 얘기하면 화난다. 왜 그런거냐?
-그야 내가 말을 툭툭 내뱉으면서 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얘길 듣고 냉정하게
얘길 할 수가 있냐?
-그래. 알았다. 나 자료 만들어야 한다. 이따가 집에 들어가서 전화 할께.
-알았어. 빨리 하고 들어가. 참! 약은 먹었지?
-아니.
-왜 안 먹었어? 혈당은 재봤어?
-혈당 잴 시간이 어딨어
-죽을래? 그런 거 좀 신경 써서 해라. 자기 몸인데 어떻게 자기가 관리도 못하냐?
-괜찮으니까 그렇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침엔 얼마 나왔는데?
-아침에 350
-정상이 150 이하 라고 하지 않았어? 뭐야?
-그러길래. 좀 높게 나오긴 했는데. 됐어.
-내일 아침부터 오빠 음식 먹는 것 체크 해야겠다. 내가 혈당 매일 기록해야겠다.
-그래 알았어. 끊자.
-알았어. 수고하고 들어가서 꼭 전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