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그런 말이 있냐? 별로 듣기에 나쁘지 않다만..어째 뼈가 있어 보인다." 그는 웃으면서 되받아치고 있지만, 어쩐지 허허롭고 쓸쓸해 보인다. "영은아, 왜 그동안 그렇게 소식이 없었니? 얼마나 찾았는데.. 너 정말 나쁜 친군거 알아?"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미안, 그냥 좀 일이 있었어." 차안의 공기는 마치 남극이나 북극처럼 차갑고 또 차갑다. 무슨말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자꾸 숨 쉬기가 어려워 짐을 느낀다. "예전에 나 파리로 간다로 연락했을 때 왜 안나왔니?" ..." 마음은 하고 싶었는데..몸이 안좋아서. 그땐 정말 미안했어. 두고 두고 후회했는걸"
*3월의 한가운데*
진을 만났다. 그와 입학식날 헤어지고 나서 일주일즘 지나서 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여기저기 푸르게 돋아나는 작은 들풀들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그는 막힌 걸 싫어한다고 했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좋고, 햇살이 좋다고 했다. 나도 그래야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그는 잘 컸다. 다른게 아니라, 건강하고 씩씩한 청년이 된 것이다. "진아, 우리 학교앞 미리네 가자. 거기 좋더라. 언젠가 언니따라 한번 갔는데 남친 생기면 꼭 같이 가고 싶었어. 시원한 젊은 이들이 가득하고, 즐거움이 있을 거 같아. 가자." 나는 꼭 어린아이처럼 조르고, 그는 아빠처럼 달랜다. 그곳까지는 걸어서 30분즘 걸리는 거리다. 참많은 이야기 들이 오갔다. 그 짧은 시간에 마치 헤어져 있던 모든 시간을 기억해 내려 했던 것이다. 부모님, 친구들, 학교, 그리고 연애까지, 이야기의 끝에 우리는 미리네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조금 한산하긴 했지만 그곳엔 사람들의 냄새로 가게안이 술렁이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 하얗게 페인트를 칠한 벽과, 그 벽에 낡은 클림트의 그림 "키스"가 걸려 있었다. 그는 구석으로 가자며 내 손을 잡아 거의 끌다시피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손의 감촉, 따뜻한 습기가 가늘게 느껴지던 그의 손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아이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그는 블랙러시안을 나는 핑크레이디를 한잔씩 주문했다. 짧은 침묵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영은아, 정영은"그는 이름만 부른다. "내가 옛날부터 좋아한거 니 아나? 니는 그때도 인기 많았다 아이가. 니 서울 전학가고 내는 식음전폐했었다. 몰랐재." 그의 볼에 회심의 미소가 돈다. 차마, 어려서, 몰라서 할 수 없었던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너그 서울로 이사간다고 니 내한테 학교 마치고 살짝 말했던거 기억나나? 주소적힌 종이 내밀면서..내 그때 니 따라 서울 오고 싶더라. 그 어린 마음에" 그는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수줍어 한다. " 내 미대 간 거 니 얼굴 그릴라고, 그래서 나중에 만나도 안 어색할라고..니 그 마음 알겠나." 무슨 말인가 적절한 말을 찾아야 했다. "그래, 나도 너 다시 만나서 너무 좋아, 기쁘구." 잔이 비어갈 무렵에서야 그는 고개를 든다. 그제서야 얼굴을 마주한다. 날렵한 턱선에 강인한 인중, 그의 눈썹이 먹처럼 검다는 것도 새삼 알아낸다. "너가 미대갈 거란 생각 못해 봤어. 넌 인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는 우스게 소리로 이 사건을 무마하려는 심산이다.그는 한층더 심각해진 얼굴로 나를 본다. "내가 니한테 모자라는 사람인 거 안다. 그래도 말은 해야지. 그래야 맘도 편하고, 니도 내를 친구로 안 여길테고" 그렇지만, 그의 말은 나를 더욱 혼란 스럽게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진아 더 좋은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여기서 너무 힘 빼면 어쩔려구 그래" 그는 단호히 말한다." 니 아니면 누구도 상관없다. 내한테는 니뿐이다." 단정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낡은 벽에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그곳엔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른 후에 후회할 수도 있음이야. 칵테일을 한잔 더 시킨다. 심드렁한 표정의 아르바이트생은 마치 물고기 처럼 펄떡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순간 분위기가 올랐다가 다시 내려 앉는다. 자이로드롭처럼. 그의 말을 들은 까닭일까?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영은아, 정영은. 내 만한 사람없다. 잘 생각해 봐라." 대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려운 얘기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내가 살께." 내심 나쁘진 않았다. 그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안스럽기도 하고, 어느날 갑자기 닥친 이런 낭패스러움을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그의 어깨에서 힘이 훅하고 빠지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미리네에서의 만남은 그 즘에서 끝났다. 돌아오는 길은 내내 힘겹고 지루했다. 마음을 결정짓는 건 이성으로 되는 일이 아닌가 보다. 그후로도 여러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현정과 동반한 만남이 길어질 수록 나는 진한 우정같은 걸 느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졸업과 동시에 그는 파리로 떠났다. 많은 일들을 열거하느니 한마디로 "니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내겐 숨쉬는 것과도 같아, 잘 지내라." 는 달랑 한통의 편지로 모든 추억은 그렇게 불쏘시게로 끝났다.
"진아, 잘 지냈니? 파리는 어땠어. 너 얼굴 좋아 보인다." 나는 무슨 말이든 찾아서 해야 했다. 그의 눈썹이 떨릴 수록 내 마음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에야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그에게는 변명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기다렸고 보기좋게 차였다. 그에게 애타게 만든 만큼 나의 애간장도 다 타고 없었다. "왜 내가 그렇게 싫었냐?"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너 싫어한 적 없어. 내가 너 싫어한다고 그랬니? 그냥 그때는 그랬어." 정말 내 마음을 모르고 하는 말인 듯하다. " 사실 내가 네게 많이 모자라는 게 맞아. 넌 훌륭한 선택을 한거야." "그래도 한번즘은 물어볼줄 알았어. 같이 가자고" 당황해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왜 말안했어. 난 너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어. 남자로는 말야" 진은 정말 놀라고 있었다. "은아 내가 널..." 어쩌면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연락없이 살았던 시간들 속에서 서로에게 은밀한 텔레파시같은 걸 보내고 있었으니말이다. "말을 해도 오해가 쌓이는 세상에 살아. 말을 안 하는 데 어떻게 알겠냐. 왜 아직 혼자야" 그는 다시 태연히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묻냐. 너 때문이지'마음은 그를 향해 소리지른다. '나쁜놈' 나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저기서 세워줘" 담담해지는 마음을 느낀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내려가도 좋고 네가 오면 더 좋고" 공항 입구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우기는 그를 뒤로하고 비행기를 탔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을 생각에 짜릿함 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