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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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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사건


BY 이마주 2003-09-14

<사건에 사건>

 

솔희가 울면서 전화를 한 건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남편의 쪽지에 아둥거리느라 잠도 못자고 출근하는 차 속에서였다. 내 자신의 문제에 빠져있느라 솔희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없다는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으로 먼저 말을 꺼내려 했지만 분위기가 그게 아닌거였다.

"연우야, 나쁜 놈.. 엉엉. 나 어떻게... 그 나쁜 놈 연락처도 안남기고 그냥 사라졌어."

어제 밤새워 나를 찾던 이유는 솔희가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서였던 거였다.

한 눈에 마음을 뺏긴 내 친구와 묘령의 남자는 밤새워 얘기를 나누고 급기야 원나잇스탠드까지 감행한 상태였다.

솔희는 여지껏 그녀의 연애파일을 검색해 봤을 때도 절대 섣불리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리버럴한 '사랑지상주의자'였지만 양호선생님이라는 그녀의 직업과 맞물려 자신의 행복과 건강을 항상 잘 건사해왔기에 함부로 몸을 굴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남자를 사귀게 되면 그의 성격, 행동, 건강상태 등등을 철저히 챙긴 후에 작업에 들어가는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몽롱한 출근길에 그 것도 명이 운전하는 조수석에 앉아 친구의 사생활을 중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몸 추스리고 빨리 출근하라는 말밖에 해 줄 수 없었다.

솔희는 이판국에 출근은 무슨 출근이냐며 학교에 병가를 냈다고 했고, 일 끝나자마자 빨리 오라고 난리를 부렸다.

 

현장은 현장대로 아수라장의 형국이었다.

현장 인부들이 단체로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인력회사 사장은 영 의욕없는 얼굴로 자기 회사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인부들이 집단 스트라익을 일으켰다는 말만 거푸 해댔다.

칼날은 어김없이 한 톤 다운된 목소리로 한 시간이내에 오지 않으면 나머지 계약분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 지우겠다고 한 마디만을 던지고 돌아섰다.

아마도 실제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더 빨리 결제를 받으려는 얄팍한 계획인 듯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당장에 연구소에서도 컴플레인이 나올 테고 막바지 마무리가 코앞에 닥친 마당에 한시가 급한 터였다.
암담한 마음에 어떻게던 현장 마무리를 잘 해보려고 운동화를 고쳐신고 있을 때 실장이 날 쳐다봤다.

"우연우씨 차가지고 왔죠?'
하필 이럴 때 왜 내가 차가지고 왔는지 물어보는 것일까?

머피의 법칙이 신속한 소리를 내며 사이렌을 울리지 말기만을 기도했다.

여지껏 회사일을 하면서 한 번도 실장은 차를 안가지고 온 적이 없었다.

"저 어제 회사 주차장에 두고 갔는데요.'
칼날의 눈썹 한 쪽이 심하게 찌그러졌다. 마치 '너 어제 외박이라도 했냐?'하는 아주 붉은 색안경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는 윤 명에게 차를 빌리더니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졌다.
"갑시다."

명의 차를 타고 실장은 강남역 뒤편의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픽업하더니 나더러 윤명의 차를 운전하라고 했다.

이런 개인일에 나를 부려먹다니 순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회사에 와서 컨펌이 안끝난 복도의 웨이팅 체어의 페브릭을 가져가야 했지만 차 두 대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구지 시간의 경제성을 들먹이는 그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어 불쾌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실장의 차 꽁무니를 쫓아가며 한 참 궁시렁 거리는 내게 문득, 실장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뒷자리로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갑자기 반짝거리며 아침에 실장의 옷이 어제와 똑같은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럼 칼날이 외박을?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진거였다.

그것도 보기 좋게 나에게 헛점을 보이면서.

만화에나 나올 듯한 음흉스러운 키들 거림이 절로 나왔다.
옷을 갈아 입어야 하기에 구지 아침 시간부터 차를 가져와야 했던 거고. 시간상으로 집에 갔다오기엔 알리바이 형성하기에는 짧고, 그래도 만만한 내가 현장에 있는거 보다는, 명이 있어야 하고, 명의 차를 움직이려면 한 명이 필요하고, 사무실에 갈 때도 말이 되고...

어릴 적 봤던 형사콜롬보의 영감이 이렇게 도움이 되나 스스로 대견해 하며 사무실 주차장으로 미끄러져갔다.

실장은 어느새 먼저 도착해서 말끔히 옷을 갈아입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있었다.

"왜 웃습니까? 뭐 일에 도움되는 아이디어라도 떠 올랐습니까?'
평소같으면 이미 마음에 상처로 남을 그의 물음에도 나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네, 저 그런 건 아니지만... 실장님 요즘 일을 너무 마니 하시는거 아니세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칼날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항상 사무실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그의 싱글라이프가 화제였다.

특히나 애인도 없는 그가 어떻게 그의 남성성을 해소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어젯밤은 미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특별한 시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는거 같았다.

뭔가 약점을 잡은 사람의 맘이 되니 실장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가벼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시부모님의 소식이었다.
결국 점심시간이 채 못되어 나는 남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아마 우리의 헤어짐 후에 내가 먼저 건 첫 전화였으리라.
그는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일년전의 상황이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듯 보이게 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사람은 회사에 있었다.

내 전화에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었던지 상당히 놀란 목소리였다.
"전화를 다 주고.. 놀랐구나? 어머니가 급성 장염이시래. 급하게 입원하셨는데 다행히 그리 위험하지는 않고 3,4일 정도 치료 받으시면 호전되실거 같아. 그나저나 고맙다."
"고맙긴.. 근데 할 얘기, 해봐. 들을께."
"음... 오늘도 퇴근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야할 거 같아. 미안한데 내가 나중에 연락할께. 나중에 만날 수 있지?"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더 만난다고 나와 그이 사이에 무슨 일이 새로울 수도 없을 거였다.
"그래. 알았어요. 저기 어머님 빨리 나으시길 바래. 끊어요."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생각은 훨씬 복잡해졌다.

이렇게 자꾸만 마무리가 안되는 우리의 관계가 버겁기도 했거니와 이런 식으로 항상 뭔가가 지속되는 것이 이혼일까하는 생각에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를 얼렁뚱땅 때우는 기분으로 마치고 서둘러 솔희의 집으로 향했다.

막상 집으로 가려는데 솔희는 구지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근처 카페로 나온 솔희의 몰골은 끔찍 그 자체였다.

아로미 마냥 퉁퉁 부은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손에 감싸고 나온 손수건에 연신 눈물을 찍어대며 사건일지를 읇어댔다.

"연우야, 나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됬나봐. 나 그 사람 어디서 찾니? 나도 이런 일은 이 나이먹고 처음이라 어의도 없고 마음은 급하고 미쳐버리겠다. 이으그 나쁜 놈, 나쁜 놈. 어쩜 그러냐? 잡히기만 해봐라. 허후.

그래도 내 평생 그런 밤은 처음이었어. 너 알지? 나 샤프한 남자 좋아하는거?"
"알지. 근데 그 사람은 샤프가 아니라 샤프심이라도 됬다는거야? 너 어쩌다가 일을 저질렀어?"
"일? 맞아 일이 그렇게 우습게 저질러 지더라구. 어제 학교에서 회식이 있었어. 알잖아. 학교에선 내가 꽤나 얌전이로 소문나있는거? 항상 회식 끝나고 나 혼자 부족한 술 푸러 다니는 거말야. 어제도 당근 얌전 빼느라라 몇잔 마시지도 않고 집에 일찍 가야 된다고 하고 강남으로 넘어왔어. 너도 거기 알잖아. '싱글스' 들어가자마자 맥주 마시고 기분 좋게 바텐하고 노가리 풀고 그냥 그랬는데.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뭐 처음엔 신경 안썼지..

거긴 다 싱글들만 오잖니. 근데 하필 내 옆밖에 빈자리가 없어서인지 거기 앉더라.

샤프하기는 하지만 어째 나이도 있어 보이고 처음엔 별로였어.

그러다가 영화얘기가 나왔는데 거기서 부터가 환상인거야. 이 남자 나랑 취향이 똑같은 거 있지? 너 '파니핑크' 알지? 갑자기 그 영화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바텐더랑 고민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그걸 가르쳐 주는거야. 그래서 한 참을 그 영화얘기하고 셋이서 수다 떨다보니 영업시간이 끝났지 모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지만 바를 나왔어.

그런데 그사람이 갑자기 맥주한 잔 더 할래요? 그러잖아."

"맥주 한 잔 더 하자는 게 뭐? 대개 그런데서 수작부리는 놈이 다 그런거 아니야? 선수답지 않게 왜그래?"

솔희는 말 그대로 선수였다. 왠만해선 그녀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녀의 카리스마에 거의 모든 남자들이 쓰러졌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의 이중생활의 카리스마를 즐기고 살았다.

낮에는 정말 간지러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중학교 양호선생님이었다.

한가닥으로 곱게 머리를 묶고 늘 단정한 정장을 하고 지각한 번 하는 일없이 오랜 세월 동안 양호선생님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그러나 양호선생님의 모습은 칼퇴근과 함께 끝나고 그녀의 주 활동시간인 밤이 더 잘 어울렸다.

 

용의주도한 솔희는 강북의 학교에서 떨어진 강남이 주 활동무대였고 수년간의 이중생활속에서 우연히 학교선생님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절대 솔희를 알아보지 못했다.

직업과는 달리 그녀는 여느 연예인 못지 않게 화려했고 대담했다.

한창때 놀던 가닥도 30대가 되면 어느 정도 풀이 죽는게 대부분이지만 유독 솔희만은 정말 체질이었다.

그녀는 취하는 법이 없었고 새벽에 아무리 늦게 자도 기상시간은 언제나 일정했다.

그런 솔희기에 남자들을 요리하는 것도 거의 환상이었다. 여지껏 만났던 남자들은 그녀가 헤어지자면 헤어져야 했고 다시는 찾아오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의 마지막 이별은 남자들을 질리게 했다.

하지만 과거의 남자친구들을 우연히 만나면 그들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 듯 누구하나 상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솔희는 정말 프로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아무런 준비없이 누군가와 사건을 저질렀다는게 나로서도 믿기 어려웠다. 프로선수에서 2진으로 밀려나는 그런 순간인 것처럼.

"그러게 말이야. 별로 특별한 말도 아니잖아? 나도 알아. 근데 나도 기분이 좋았거든 . 대개 남자들이 그렇잖아 감수성이 다르니까. 여자랑은 취향이 같기도 어렵고, 또 나 자신도 너무 페미닌한 남자는 오히려 약해 보여서 싫어하는거 너 알지?

근데 맥주 한잔 더 하자는 게 무슨 매직같더라고?"

"솔희야. 너 혹시 요근래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또 본거 아니니? 네 입에서 매직이라는 소리가 나오면 난 웬지 불안하더라?"

"우연우, 조용히 하고 내 말들어!!! 어디까지 했지? 그래 맥주, 바에 틀어 혀혀있던 게 답답해서 그냥 편의점에서 사다가 벤치에 앉아서 먹자고 했더니 그사람도 그러자고 하더라.

새벽에 사람들도 없고 가로등만 켜있고 분위기 죽이더라. 그냥 벤치에 앉아서 말없이 술만 마셨는데 그게 하나도 안 지루한거야. 기분이 편하고 그냥 좋은거.

그러다가 그 남자가 나한테 그러는거야? '그래도 사는 거 참 재미있죠? 이렇게 낯선 사람끼리 아무 경계심 없이 맥주도 마시는 날이 있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이야."

"그래서?"

"너무 로맨틱하지 않니? 사는게 재미있다고 말하는거 말이야."

"너 지금 그 말 때문에 그사람하고 잤다고 말하는거야? 말도 안돼."

"말돼. 이 아줌마야. 넌 어째 얘기 듣는 태도가 너무 부정적이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게."

"미안... 인정,인정. 그래서 어떻게 된거니?"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가 너무 섹시해 보이는거야. 그래서 내가 장난처럼 살짝 뽀뽀를 했거든. 나도 미쳤지 무슨 병이라도 앓고 있으면 어쩌려고 먼저 그랬는지... 근데 암튼 그렇게 됬는데, 그 남자가 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봤지? 그 것처럼 갑자기 내 허리를 꺽더니 키스를 하는거야. 아, 정말 녹아 버리는 줄 알았아.

그렇게 쳐다 보지마. 나도 내가 이해가 안되니까. 그러고 나서는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걸 알았지.

그 때도 역시 그사람은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호텔로 걸어 들어가서는 우리는 원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건데.

내 평생에 그렇게 열정적인 남자는 처음이었어. 마치 굶주린 사자 같더라고...

근데...새벽에 눈을 떠보니 그가 없는거야. 흔적도 없이 마치 정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거처럼."

"다시 만나자는 말도 없이? 너 그사람 연락처 몰라?"

"연락처는 무슨.. 이름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미칠지경아니니?"

"뭐? 너 미쳤니? 환장하겠다. 너 제정신이야? 그 놈 선수잖아, 이그 헛똑똑아. 넌 후보선수도 아니다."

말 그대로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였다.

나이도, 주소도 대책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랑 하루를 보내고 그 남자를 찾겠다는 솔희를 보니 정말 화가났다.

한동안을 죽일 듯이 펄떡 거리며 뛰는 나를 보고 솔희가 한마디 던졌다.

"야, 너무 그렇게 몰아부치지마. 그래도 뭐 하는 사람인거 안단말이야."

"그래? 뭐하는 사람인데?"

"월급장이"

한강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부디 그남자가 나쁜 남자나 사기꾼이 아니길 빌며 그래도 그 남자를 다시 보고 싶다는 솔희가 측은해 져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나왔다.

솔희는 어떻게 던 그 남자를 찾겠다면서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자며 파트너 쉽을 요구해왔고 나는 어떤 선택권도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야 했다.

때로는 인생의 곳곳에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잡고 싶지 않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후회로 빌려오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잡고 싶어도 한여름 밤의 유성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연도 있는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