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구>
솔희와의 만남은 내 삶의 시트콤이다.
내가 이혼녀라면 그녀는 노처녀이다.
물론 no처녀이기도 하지만 아직 결혼할 남자조차 구하지 못한 입장인 솔희는 그래도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가는 미워할 수 없는 내친구다.
술 좋아하기로 이름난 솔희는 오늘도 역시 잘나가는 포차로 나를 불렀다.
연예인들도 심심치 않게 출연하는 그 포차는 출입하는 사람들의 의상 역시 눈요기가 충분히 되는 곳이었다.
"야, 이런데 우리같은 노땅들 오면 물 흐린다고 안쫓아내니?"
"얘는,쫓아내긴 누가 쫓아내. 매상 팍팍 올려주지, 그리고 너도 아직 옷발 잘 살아서 괜찮아. 다 날날이 같은 젊은 애들만 있는 것보다는 나처럼 있어 보이는 중년 아가씨가 있는 것도 일종의 코디야. 차 가져왔지? 오늘도 나 혼자 마시다 가게 생겼네."
"미안해, 내가 그래도 안주발로 너 술친구해주고 기사 노릇도 해주고 괜찮잖아."
"알았다구. 너 얼굴이 왜그래? 우연우 너 왜그래? 무슨 일있어? 그 미선이 계집애가 또 찾아왔냐? 망할 놈의 기집배 . 걔가 그렇게 노니까 아직도 고모양이야. 까놓고 말해서 네 남편도 그렇게 안봤는데 남자는 어쩔 수 없나봐?"
"안잤대."
"엉 그건 뭔소리?"
얘기하기 싫었지만 난 또 미선이 얘기를 해줬고 듣고 난 후 차분해 질 줄 알았던 솔희는 더 방방 뛰었다.
"어머, 어머. 걔 진짜 무섭다. 내 동생 얘기로는 걔가 그렇게 까지 여우는 아니었다는데 야 사람 잡겠다. 그런 애 조심해야지, 갑자기 핀가면 통제불능이야. 내동생 선희도 이제 미선이하고 연락 끊었대. 그 계집애하는 짓이 너무 어의가 없어서. 괜히 연우 너 한테도 미안하고 그렇다나? 암튼 그래도 네 남편하고 아무일 없었다니까 기분은 좋았겠는데? 아닌감?"
"기분? 그런 거 없어. 그 냥 사는게 복잡하다. 남의 돈 벌어먹기도 치사하고 칼날같은 실장 땜시 숨막히고, 나이어린 직장 선배는 찝적거리고, 전남편 좋다는 여자는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느닷없이 그 쪽까지 나타나서... 기분? 정말 노굿이야."
"그 쪽? 그 쪽 이라니? 야 너 박이삭 말하는거야? 맞다 맞다. 걔 그 연구소 수석이지? 만났어? 응? 야, 말해봐 답답해 죽겠다. 왠일이니 왠일이니.. 첫사랑 만나니까 어때? 하긴 솔직히 난 옛날부터 걔 싫었어. 웬지 밥맛없어. 아무때나 목소리 쫘악 깔고 지가 무슨 성우야? 혼자 고고한척. .. 잘나긴 잘났지만 그래도 남자로서는 매력 없어. 그러고 보면 너 남자 취향도 아주 독특해요. 넌 너무 극과 극 아니냐? 이삭이도 그렇고 시헌오빠도 그렇고?
그래도 네 남편은 남자다운 매력이라도 있지.. 난 너랑 시헌씨랑 헤어졌다는 거 듣고 처음엔 정말 놀랐어.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거든 . 닭살커플이던 니네가 정말 이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안 믿어지더라. 니네 그래... 이럲게 말하는게 옳겠다. 잘모르는 사람이 겉모습으로만 보면 정말 잘 어울렸거든...
아직도 연락오지? 오빠도 참. 참참 박이삭은 뭐라디?"
"하나씩 물어봐. 정신없다. 안그래도 해골이 복잡한데 너까지 돌게 하지마.. 음 우선 밥맛없는 박이삭은 역시 잘났고 잘지내더라. 정말 웃기는 건 날 아직 사랑한대? 정말 기분 거지같더라. 그리고 남편 연락하지 말랬더니 연락 안하네... "
과격한 솔희는 연거푸 술을 마셔댔고 지금 이렇게 친한 친구와 앉아서 푸념을 늘어나도 내일이면 또 다시 같은 문제로 시작될 하루가 있다는게 짜증스러웠다.
앞에 앉은 솔희가 쉴새 없이 늘어놓는 구수한 입담이 없었다면 나혼자 너무도 가라앉아 있을텐데.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들만의 세상이 여기있었다.
포차는 꽤나 붐볐고 여기저기 TV에서나 보던 연예인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변에 한번이라도 갈이 놀아보겠다고 물찬 제비처럼 차려 입은 청춘들이 여럿 보였다.
산만하고 들뜬 분위기인 이곳을 솔희는 꽤 좋아했다.
"솔희야. 넌 이런 데가 좋니? 난 나이가 들었나봐. 너무 정신없다."
"기지배. 그래도 이런대 데리고 놀러 와 줄 친구가 있다는 거 고맙게 생각해라. 봐, 얼마나 싱싱하고 귀엽냐? 에구구, 이렇게라도 젊게 놀아야지 노처녀 스트레스 누가 풀어주냐?
젊은 기 팍팍 받고 눈요기 실컷하고 또 열심히 살고 그게 내 철칙이다. 그나저나 이젠 슬슬 이 생활도 끝내야 될텐데..
밤마다 허벅지 꼬집고 자는 것도 이젠 한계야. 온 몸에 멍이라니까"
"어쭈 누가 들으면 숫처녀인 줄 알겠네? 이봐요 아가씨, 남자친구랑 헤어진지 얼마나 됬다고 외롭단 타령이야? 이혼한지 일년된 친구앞에서?"
"어머머? 너 정말 못됬다. 넌 결혼 생활 5년동안 할만큼 한 아줌마고 난 아직도 식구들 눈치 보면서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노처년데 외롭지. 안외로워?"
"그래 말된다, 술이나 마셔."
"그래도 너 대단하다. 이런 얘기하면 웃기는 거겠지만 어차피 이혼한거 나라면 벌써 애인 만들어도 서넛은 만들었을거 같은데..너 혹시 나모르는 앤 벌써 있는거 아냐? 안그러면 어떻게 알거 다 아는 아줌마가 일년이 넘게 남자 물건 구경하나 안할 수 가 있어? 응? 말해 놓고 보니까 더 수상하네? 응?"
"누가 듣겠다. 별걸 다 궁굼해하네. 따지고 보면 남들이 궁굼해하는 것도 그런 쪽이 많은 거 같더라. 너처럼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만 어째 바라보는 눈치들이 꽤나 궁굼한가봐? 몰라 나도 내가 이상해. 어떤 때는. 나 사실 그거 싫어하지 않는데, 근데 이상하게 막상 도로 미스가 되느까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어지더라? 웃기지?
잘은 모르지만 남녀관계라는게 관계이전에, 사람하고 먼저 감정이 통해야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게 싫은 거 같아. 아직은 난 누굴 만날 때가 아닌가봐. "
"그래 뭐 서두를거 없지뭐. 요즘은 노처녀보다 이혼녀가 인기가 있나봐. 맨 드라마에서도 중년의 이혼녀한테 목메는 멋진 남자애들 많이 나오자나. 에구 나는 왜 그런 복도 없냐? 이젠 소개팅도 뜸해지고 이런데서 눈맞추자니 나도 쫀심이 있고 그러니까 자고로 여자는 일찍 팔리고 봐야되."
"너 말 조심해라. 요즘 그런 얘기 함부로 했다가는 여성 권익단체에서 당장 난리난다."
"그런가? 아님 말구.히히"
솔희랑은 주거니 받거니 하고 기분좋게 지낼 수가 있었다.
항상 솔희가 어서 좋은 짝을 만나 그녀의 맛있는 음식솜씨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여주길 바랬지만 왜그런지 이상하게도 그녀는 결혼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늘 빨리 시집가고 싶다고 했지만 상대방이 조금만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오면 꼬리를 감추고 이별을 통고하기 일쑤였다.
내 입장에서야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벌써 학부형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죽이네 살리네 해도 정작 이혼한거는 나밖에 없었고 그녀들은 가정의 울타리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저녁시간에 이렇게 객쩍은 소리하며 나와 놀아줄 친구는 솔희밖에 없었다. 솔희는 몇잔의 술잔을 더 비웠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헤어졌다.
여자들의 우정은 수다로 시작해서 수다로 끝나는거 같지만 오히려 남자들 보다 서로의 현실에 대한 감정이입이 쉬어서 그런건지 마음을 다독거려주는 거는 여자친구와의 만남이 훨씬 더 좋았다.누구나 그런건 아닐런지 몰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