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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코를 타고


BY 영원 2003-09-17

 

이런저런 일들로 나의 정신 상태는 혼미해졌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나의 가치관의 기준 때문에 때늦은 사춘기가 온 듯했다.

아지트의 규칙으로 인해 MT도 못 가고, 환영회나 개강식 등 모든 행사엔 참여할 수 없었다. 신앙이 흔들리면서 자유스런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 중 항상 시간에 쫓기는 내가 제일 부러운 것은 특히 시험기간에의 그들처럼 '많은 시간과 자유'였다. ‘아마도 그들만큼의 시간이 있다면 벌써 박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라는 아쉬움에 코웃음이 쳐졌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택한 길인걸. 누굴 나무랄 수도 없다.


어느덧 기말고사가 다가온다. 기말고사만 끝나면 알아서 방학이라는데 대학생활이란 정말 자유스러운 것 같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나의 화장 솜씨를 보며 ‘자기만족’에 빠져있다.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화장을 고치러 화장실로 직행. 그렇게 화장실에 왔다갔다하며 나의 마음도 조금씩 고쳐지고 있었다. 아니 열려지고 있었다.

아지트 밖으로 대학을 다니며 나의 외모와 습관이 많이 달라졌다. 모두 아지트의 금기사항을 하나씩 깨어나가는 방향으로. 아지트와 학교를 오가며 워크맨으로 듣는 가요와 팝송, 안하던 화장. 그리고 제일 위험한 남학생들과의 자연스런 대화. 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에 대한 나의 관심?

그렇다. 나도 모르게 김현민씨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 나는 ‘김현민씨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될까?’하며 혼자 속으로 연습하곤 했다. 쉬는 시간에도 아니 틈 날 때마다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 애쓰는 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애지중지 여기던 워크맨이 고장나 버렸다. 회사 버스 안에서 떨어트리는 바람에 두 동강으로 분리되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학비까지 충당하고 있는 나에겐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이다.

‘우앙 이를 어째? 수리도 안 되겠고 같은거 사려면 적어도 24만원은 줘야 될 텐데...’울상을 하며 두 동강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뭔데? 뭔데?”

“와 힘 세내. 이거 니가 그랬나?”

남은 열나 죽겠는데 눈치없는 아저씨들은 시장판에서 소리치듯 떠들어댔다.

그 때 김현민씨가 강의실에 들어서 내 앞자리에 앉더니 뒤돌아보며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살거야? 고치기엔 수리비가 더 들것 같은데...”

“사야죠. 뭐. 휴~ 어디 싸게 파는데 없나?”

난 아무 생각없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싸게 파는 곳 아는데. 같이 가 줄까?”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김현민씨가 나랑 같이? 그것도 둘이서?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에~. 시간되세요? 매일 바빠 보이시던데”

“응 이번 토요일 어때? 평일엔 수업듣기도 빠듯하니까.”

“네에. 근데 어디로 가실 건데요?”

“음. 부전 시장 전자상가.”

“아! 그런 곳도 있어요? 거기 뭐 파는데요?”

“한 번도 안 가봤어? 하긴 산속에 콕 박혀 사는 예진이가 어딜 가봤겠어. 회사 아니면 학교만 왔다갔다 하니... ”하고는 씽긋 윙크를 날렸다.

그 눈짓 하나에 ‘쿵쿵쿵’이젠 가슴이 터질 듯 방망이질해 댔다. 하루 종일 워크맨 고장 난 것은 잊은 채 즐거운 상상만 하며 실실 웃고 다녔다.

‘아!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뭘 입고 가지? 고맙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할까?’기말고사를 앞두고 엉뚱한 고민하면서 토요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토요일. 더디 가는 실험 시간. 몇 시간 후면 일어날 즐거운 상상에 계속 실험을 실패했다. 그럴수록 시간은 더 늦어지는데. 다행히 김현민씨 조도 실험이 늦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이목도 있으니 같이 끝마쳐야 될 텐데.’

나는 조그마한 것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예진아? 니 오늘 무슨 일 있나? 실험 안 할 끼가?”

같은 조 사람들은 반복되는 실험에 약간 짜증섞인 말투였다.

“네. 아니요~ 죄송합니다.”

김현민씨가 힐끗 바라봤다. 살짝 미소를 띠며.

‘윽. 이게 아닌데.’

시간은 흐르고 실험 수업 마칠 시간이 훨씬 지났다. 아직까지도 실험을 끝낸 조는 없었다. 보다 못한 조교는 안 되겠는지 다음주에 계속하자며 마쳤다. 실험을 정리하며 난 김현민씨를 바라봤다.

‘어떡할까요?’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김현민씨는 턱으로 창문너머 바깥 주차장을 가리켰다. 토요일이라 텅 빈 주차장엔 빨간 티코 한 대가 앙증맞게 세워져 있었다. 순간 김현민씨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학생이기에 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막상 티코를 타고 다닌다니까 조금은 드라마 같은 배경이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에이 그래도 이게 어디야? 대학생인데 차도 있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간 후 김현민씨와 나는 티코에 탔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으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랄까...'이런게 데이트하는 기분일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를 벗어나고 큰 길을 달리는데 부두가 많아서인지 도로 위엔 커다란 컨테이너 차량들이 즐비했다. 티코를 타고 컨테이너 차량들 사이로 지나갈 땐 정말 눈이 꼭 감겼다. 어찌나 큰지 티코만한 바퀴밖에 보이질 않았다.

“예진아? 무섭니? 뭐가 무서운데? 더 빨리 달리까?”하며 김현민씨의 우스개 소리에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한 손은 손잡이를, 또 한 손은 안전벨트를 꼭 잡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김현민씨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질문은 주로 꼭꼭 숨겨진 아지트에서의 생활 내용들이었다. 아지트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세세한 것까지는 말할 수가 없었지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라면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김현민씨에 대한 나의 마음까지도. 지금만큼은 아지트의 양심규칙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이 작은 티코 안이 마음의 쉼터가 된 듯 편안했다.

아지트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던 내가 이제는 아지트를 벗어나야 편안해지다니 대학 4년도 아닌,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벌써부터 아지트의 타락한 존재로 변하고 있는 나를 느끼며 이 티코안의 마음의 쉼터에서 쉬어야 할지 유혹을 뿌리쳐야 할지 또 망설여졌다. 그러나 나도 인간의 간사함을 지니고 있기에 타락의 유혹을 뿌리칠 순 없었다. 그동안 너무 지쳐 있던 나에겐 너무나도 편안했기에.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사랑’이랬나? 내 자신을 편한대로 합리화시켜 버리고 싶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대화하며 갈등하는 동안 부전시장에 도착했다. 매일 버스만 타다 자가용을 타서인지 조금은 멀미가 났다.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에 창피했다.

“가자. 저기야. 너 예산은 얼마정도 생각하니?”

“싸다니까 한 20만원 정도?”

“그렇게 많이? 일단 둘러보자. 네 맘에 드는 게 있는지. 어떤 집이 제일 싼지 둘러보자”

“네.”

큰 오빠 따라가는 동생처럼 졸래졸래 따라 들어갔다.  조그마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부분 같은 제품들이었지만 가게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김현민씨는 마치 자기 물건 사는 양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 많은 가게들을 헤집고 다녔다. 모두 돌아본 후 난 기억도 못 했는데  김현민씨는

“저기로 가자. 저기가 그래도 제일 좋고 싼 거 같다.”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순간 당황하여

“어머!”하고는 난 그의 손에서 팔을 뺐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김현민씨도 무안했는지 얼른 손을 뗐다.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 유난스러웠던 나의 행동에 무안해 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죄송해요.” 한 마디 하고는 고개를 숙여 땅만 쳐다봤다.

“괜찮아. 내가 더 미안하지. 가자. 시간 많이 지났다.”그는 웃으며 앞장섰다.

가게에서 그와 아저씨의 오랜 흥정 끝에 내가 원하던 워크맨을 12만원에 살 수 있었다. 24만원에 살 것을 반 값에 샀다.

“마음에 드니?”

“와 대단하시네요. 난 10원도 못 깎는데...”

상가를 나오며 땡잡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예진아! 너 집에 가는 길 알어?”

“네?”

순간 멍해졌다. 그와 같이 간다는 즐거운 상상만 했지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아지트와 학교만 오가는 내가 부산지리를 알 턱이 없었다. 데려다 달랠 수도 없고 산속에 콕 박혀있어 교통편도 많지 않은 아지트를 혼자 찾아갈 엄두는 더더욱 나지 않고 정말 난감했다.


‘어쩌지? 해운대까지만 태워달라고 할까?’


“예진아?! 예진아?! 내 말 안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