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다.
점심 시간도 지나고 이젠 슬슬 손님들이 몰릴 시간이다.
그러나 불경기 탓인지 요새같아선 옛날처럼 매장앞 복도가 손님들로 북적북적 거리는걸 바란다는것 자체가 욕심이다. 그저 평균 매출이라도 올려서 본사 이대리한테 왜 이리 매출이 없냐며 이유에 대해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라는 소리나 안들으면 다행이다.
손님이 없으니 더 졸립다. 둘째랑 막내 눈도 거의 감기기 일부 직전이다. 대기 자세로 있을때에는 항상 입가에 미소를 짓고 밝은 표정으로 서있으라지만 손님도 없고 피곤하고 졸려 죽겠는데... 솔직히 그건 어디까지나 윗분들 희망사항이요 이론상으로나 가능하다.
이럴땐 바보같이 셋다 매장에 있는것보단 한명씩 보내서 진하게 커피한잔 마시고 오라고 하는게 더 현명한 방법이다. 손님도 없으니 둘째랑 막내랑 같이 보내기로 한다.
``손님도 없는데 서서 꾸벅꾸벅 졸지말구 둘이 가서 커피한잔 마시고 와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녀석 기다렸다는듯이 `그럼 다녀올께요` 하며 휭~ 하니 나간다. 나한테 `언니 먼저 다녀오세요` 말한마디 없이. 요즘 애들은 확실히 우리때랑 다르다.
말 한마디라도 `저흰 나중에 갈께 먼저 다녀오세요` 하면 얼마나 좋아. 에궁 요즘 애들보고 우리때처럼 회사 생활하라는거 자체가 모순이지. 스스로를 위로한다.
두녀석을 보내고 혼자서 매장에 있는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오신다.
앗싸~!
``어서오세요. 손님!``
한껏 친절을 오버하며 인사한다.
``내가 이번에 백두산엘 가는데 거기서 입을 잠바좀 보여줘.``
``어머! 백두산에 가세요. 좋으시겠어요. 자녀분들이 보내주시나봐요``
백두산이든 해외든 이정도 연세의 분들이 가실땐 백팔백중 자식들이 보내드리는 효도관광일때가 많다. 그럴때 은근히 손님들은 자식자랑을 하고 싶어한다. 자식 잘 두어서 이나이에 여행 다니며 편하게 사는 노인이란걸 보여주고 싶은거다.
역시나 할아버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다.
``우리 아들놈이 말이여 교수야, 교수! 작은놈은 의사고 셋째놈은 조그맣게 사업하는데 돈은
지 형들보다 더 잘벌어. 며느리들도 어찌나 효부인지. 이번에 내가 칠순인데 요녀석들이 서로 돈을 모아서 여행을 보내준다잖아. 뭐 유럽 일주인가 하라는데 난 백두산에 가고 싶어서 백두산 보내달라고 했어. 내 고향이 황해도거든. 금강산엔 전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백두산이 가고 싶더라구.``
``그래도 해외 여행이 더 좋지 않으세요?``
``무슨 해외여행? 요즘 젊은것들 문제야, 문제! 툭하면 해외 여행이다해서 밖에나가 돈 뿌리고 다니고. 아 우리나라도 좋은데가 얼마나 많은데. 난 해외여행 싫어. 고조 통일이나 되어서 북한땅이나 실컷 밟아보고 죽어도 여환이 없겠어.``
어느새 할아버지 눈가가 서글프다.
백화점에 있으면서 손님들 상대로 물건만 파는건 아니다. 물건을 팔다 보면 손님들과 이런저런 애기도 많이 하게되고 간혹 그속에서 그들의 살아온 모습을 읽기도한다.
할아버지 손님은 별로 까다롭게 굴지 않고 내가 권해준 잠바가 맘에 든다며 그걸로 하자고 하셨다. 그냥 물건만 팔려고 판매용어만 남발하게 되면 손님들은 너무 장삿꾼 같단 생각에 미덥지 못해 오히려 물건을 구입하지 않을경우가 많다. 사람사는게 다 그렇듯 딸처럼 며느리처럼 살갑게 굴며 이런저런 애기를 들어드리다보면 대부분 판매사원이 권해주는 상품에 오히려 신뢰를 갖고 구입하시는경우가 많다.
손님이 상품을 결정하고 드디어 계산할 시간!
``손님! 얼마 입니다. 계산은 카드랑 현금중 뭘로 결재하시겠습니까?``
``현금으로 할께. 아들놈들이 옷도 사입으라고 용돈 줬거든. 근대 다 받아? 깍아줘야지.``
왜 이말이 안나오나 했다. 대부분의 연세 드신분들은 말그대로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다.
가격이 싸던 비싸던 대부분 원래 금액에서 깍아야 직성이 풀리신다. 하지만 다 알아시피 백화점은 정찰제다. 정해진 가격이 있어서 그대로 팔아야 하고 오히려 판매사원 임의로 가격을 깍아주거나 하면 심하면 법에 걸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손님들에게 공정하게 판매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손님에게 싸게 팔고 어떤 손님에겐 제값 다 받고 팔고.
그렇게 사람을 차별해서 물건값을 받는건 상법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법으로도 이건 정해져있다. 절대 가격표대로 물건을 팔아야한다는...
물론 그 할아버지 손님은 정값을 내고 물건을 구입하셨다. 대부분 깍아달란 말은 하지만 백화점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절대 깍아주지 않는다는걸 알기때문이다.
손님들중엔 이 할아버지 손님처럼 애교로 깍아달라고는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왜이리 비싸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어렵게 어렵게 물건을 구입하고도 결국은 제값을 다 못내겠다고 버틴다. 아무리 정찰제라고 말을 해도 정 안되면 나중에 사은품 나오면 챙겨 드리겠다고 얼르고 달래도 소용없다. 그러다보면 결국 속에선 `에이! 안 팔어. 그냥 가!``
란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서비스가 곧 생명인 백화점에서 그렇게 말한다는건 있을 수 없다. 얼굴엔 여전히 미소를 간직하며 최대한도로 손님을 설득시켜야한다.
그렇게 진을 다 빼고서야 그런 사람들은 물건을 사간다. 심할땐 안사가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고. 이런 경우는 흔히 은어로 진상이란 진상 다 부리고 판매사원 눈치 보여 어째어째 물건을 고르긴 했는데 살 마음은 없고... 그러니 `비싸다. 깍아달라` 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면서 결국은 판매사원이 깍아주지 않으면 그걸 핑계로 그냥 가는거다.
한마디로 얌체족이다. 백화점에 있으면 대부분이 좋은 손님들이 더 많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얌체족들도 많다. 어찌나 그 수법이 다양한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정도다. 아마 그런 사람들 애기만 써도 책 한권은 나올것이다.
말이 잠깐 삼천포로 쌨다. 백화점에서 똑똑한 고객이 되는 방법을 좀 알려드리면 절대 남보다 더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게 아니다. 물론 거의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이왕이면 단골 손님이 되는것이 좋다. 이 백화점 저 백화점 다니면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물건을 구입하면 돈은 돈대로 쓰지만 우수 고객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우수고객이란게 물론 돈이 많아 백화점 매출 많이 올려주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상위 몇프로에 지나지 않고 하나를 사더라도 꾸준히 한 백화점을 이용하면서 매출을 올려주는 사람이다. 처음에야 금액이 적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금액이 누적되면서 백화점에서 보내주는 할인 쿠폰도 받을 수 있고 공연 DC티켓이나 백화점에서 하는 행사를 알 수있는 DM을 받아볼 수 있다. 매장에서도 꾸준히 단골인 손님들을 우선해서 세일이나 DC행사에 대해 러브콜을 보내고 사은품도 더 잘 챙겨준다.
제아무리 한번에 왕창 큰 금액을 주고 물건을 샀다해도 일명 한번 오고 안올 뜨내기 손님이되어버리면 결국 깍아달란 말만 하다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는 어리숙한 손님이 되어버리고 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