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 왔다.
아침부터 하늘은 희뿌연 구름을 뿜어내더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은은 이정도쯤이야 맞아도 괜찮다 싶었다.
자신의 몸 젖는 것 보다 상점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생각하며, 옷을 가슴 깊숙이 넣은채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영은의 머리위로 하늘빛 둥근 무언가가 어느새 들어와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마주편에 하늘색 우산을 쥔 남자.
검은 바지에 하얀색 남방을 입은 그를 영은은 올려다 보았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얼굴, 그러나 선뜻 생각나진 않았다.
-나 모르겠니?
'웬 반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영은
그 목소리 생각 날듯도 하는데.......
그가 먼저 이름을 말해주자 영은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 .........진우야.
-네?! 진우....오빠
너무 놀라는 순간, 영은의 가슴속에 붙어 있던 옷이 빗길에 떨어지고 말았다.
빗길위의 옷을 진우가 얼른 집어들어 영은에게 건넸다
-이거 다 베렸네. 괜찮겠어.
-네. 그것보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데.........빨리 가야 겠어요
영은은 떨어진 옷을 주워 들어 젖은 물기를 털었다.
5년만에 만나는 진우오빠인데, 손님 기다린다고 빨리 가야 겠다고......
왜 하필 그런 말이 튀어 나왔지는 후회하고 있었다.
-미안한데.......괜히 나 때문에 ..........
-괜찮아요. 저 갈께요.
-영은아, 잠깐만........
영은은 가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영은도 그가 그렇게 다시 불러주길 내심 바랬다.
그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신이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도 너무 큰 아쉬움이 남았기에........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이름을 들었을때 영은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자’
그러면 어쩌지. 그런 생각까지 한 영은
그러나 진우가 던진 말은 의외였다.
-이 우산 씌고 가.......
그 한마디.
그이상 어떤 말도 없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렇게 대답한 영은
자신도 모르게 더 냉정하게 뒤돌아서서 걸음을 빨리했다.
혹시나 다시 부르지는 않을까?
자신의 아쉬움을 붙잡아 주진 않을까 했지만 진우는 끝내 영은을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
진우는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영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자신만의 어떤 기대감에 벅차 있었기에.......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오후였다. 가게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그 소리에 어련히 손님이거니 생각한 영은.
늘 하던 인사 ‘어서오세요’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며칠전 거리에서 만났던 진우였기에.
-아니.......무슨 일로........
영은의 놀란 말.
-옷가게에 옷 사러 왔죠. 제 여자친구가 입을 옷인데, 좀 골라 주시겠어요.제일 이쁜걸로요.
영은은 모른척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
옆에 있던 이씨 아주머니를 의식하며, 자신도 그저 손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영은은 가운데 벽쪽에 걸려 놓은 원피스쪽으로 걸어 갔고 진우는 그런 영은의 뒷를 따라갔다.
-이건 어떠세요.
영은은 가슴선에 약간의 레이스가 하늘색 원피스를 들어 보였다.
-네. 그걸로 하죠.
-사이즈는?
-제일 작은 걸루 주세요.
영은은 옷을 담고, 진우는 카운터로 갔다.
-우와, 여자친구는 좋겠네요. 애인이 이런 옷 선물도 하구........너무 멋지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틀리네.
호감있게 진우를 바라보며, 거스름돈을 내 주는 이씨 아주머니.
-여기 있습니다.
혹시 옷이 안 맞거나, 여자친구가 맘에 들지 않으면 가지고 오세요. 바꿔 드릴께요.
영은은 그 옷을 넣은 종이가방을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근데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주실수 있는지..........
진우의 부탁은 이러했다.
그 옷을 자신이 전해주고 싶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청림다방에 있는 여자 친구에게 대신 좀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손님, 근데 그 여자분 이름을 가르켜 주셔야죠.
급히 가게밖을 나가려는 진우를 이씨가 세웠다
-아참.......제이름 '김진우'를 대면 알꺼에요.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영은아! 너 <청림다방> 알지
-네. 다녀올께요.
영은은 테이블에 놓고간 옷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영은의 머릿속엔 의문이 일어났다.
왜 자신을 모른척 대하는 건지,
또, 자신이 여기에 있는걸 궁금해 하지도 조금도 놀라워 하지도 않는 점에 대해........
마치 다 알고 있듯.........
그순간, 얼마전 이곳을 다녀간 진경과 주인여자아주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가족이었다. 어쩌면 나에 대해 들었을 테고.......
그래서 일부러 자기 여자 친구에게 줄 옷을 내게 사러 온 것이었구나. 그런거 였어.
그생각이 미치자 영은은 왠지 모를 허전함이 전해 왔다.
'그랬구나. 오빠한테 애인이 있었구나. 그런데 내 가슴이 이렇게 뛰는걸 어떡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