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소녀는 예쁜 여대생이 되어 있었다.
그를 까마득히 잊은 듯한 밝고 젊은 그녀 앞에 그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진수를 보기 위해 가끔씩 집으로 와도, 그의 소녀는 그에게 깍듯이 대했다.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는 서울로 향했고
그의 소녀는 선생의 길을 가기 위해 열심이었다.
포기하자는 마음을 먹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그의 소녀는 그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소녀는 그에게 삶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그의 소녀를 위해서 최고의 남자가 되어
당당하게 그녀 앞에 나서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뜻하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가 군대 있는 3년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익명으로 빠짐없이 편지를 보낸 소녀가 있었다.
가지런한 글씨로 언제나 한결같은 필체로 편지를 보낸 소녀...
그는 그 소녀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그 편지로 인해 삭막한 군 생활이 그에겐 힘든줄 몰랐고 시간의 흐름도 잊게 해 주었다.
제대할무렵 소녀는 마지막으로 편지를 끊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낀다는 <데미안>의 한 소절을 적은 걸로...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라고 한다********
그는 진수가 사는 아파트에 놀러왔다,
그녀가 그 얘기를 그대로 다시 하는 걸 들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확인하지 않을 수 또한 없었다.
그랬다.
편지를 추적한 결과 편지는 그녀가 다닌 대학교에서 보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필체와 편지의 필체는 일치했다.
남은 건 이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기회를 보고 있던 중 그는 그녀가 고향으로 내려 갔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 어긋나는 일이었다.
*
[넌 내가 너에게 한발작 다가가면 꼭 그렇게 멀어지더구나]
채 영은 자는 재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시원스런 바람과 자장가 처럼 들리는 파도 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그렇잖아도 대구 방송국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선배의 스카웃 제의가 있어 고려하던 참이었는데 너는 멀리 달아났지...어떻게 너를 다시 대구로 불러 들이나 고민하던 중, 내게도 일이 터진거다. 내 전공은 다큐쪽인데 연예쪽 일을 맡다보니 상관과 자주 마찰이 생겼어. 결국, 상관에게 대든 댓가로 난 정직을 당한거다. 마음 아프냐고? 아니...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난 내가 하고자 하는 분야를 할 수 있고 또...너를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깐. 지체않고 난 울릉도행 배에 올랐어]
회상하듯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너를 보면서 니가 내 여자란 걸 의심하지 않았어.
어떻게 다가가느냐...그게 문제였지.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역시 우리 편이더군.
너와 나, 같은 마음이란 걸 확인하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어. 그렇지?
그런데 또 변수가 생긴거다.
소라...]
윤 소라. 그녀는 방송국 실질적인 주주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형이라고 부르며 그를 무척 따랐고 그 또한 없는 동생이 생겼다는 심정으로 허물없이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소라 또한 알고 있었으니간...
그리고 그의 출세에 그녀의 입김이 적지않게 작용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소라는 적극적으로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그녀가 울릉도까지 올줄은 몰랐다.
소라로 인해 그와 그녀가 쌓아올린 탑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건 참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 꼬맹이. 소라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여자야. 자기 자신만 믿는 여자지.
그렇다고 나쁜 여자는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꽉 막힌 여자도 아니고...
내가 그랬지? 나를 믿어 달라고...다시 한번 그 말을 하고 싶다.
믿고 기다려 줘...오래 끌지는 않을테니...]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쓸어 주었다.
그의 손길을 느끼는지
뒤적뒤적 하던 재란이 슬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눈앞의 채 영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이리라...
[깼어? 술 마시고 아무데서나 자는 버릇...좋지 않은데?]
재란은 은숙을 찾는 듯 주위를 살폈다.
[널 내게 던져주고 갔어. 좋은 친구지?]
넉살맞은 그의 표정에 그제야 재란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일으켰다.
[숙녀가 자는 모습을 훔쳐 보는 것도 과히 좋은 버릇은 아니에요, 채 영씨]
머리가 띵. 했다.
... 이 놈의 가시나! 만나기만 해봐라!....
[가야겠네요]
굳이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지금은 그냥 그녀를 내버려 두고 싶었다.
[꽤 마신 것 같던데, 내일 아침 머리 깨나 아플거다, 꼬맹이]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아저씨!]
재란은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창피하고 화가 났다.
술에 취해서 정신없이 누워서 자는 자신을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영은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며칠 속을 끓인 게 한 순간에 날아갔다.
이제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