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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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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내 삶을 위해...


BY 유진 2003-06-30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나도 모르게 더욱 기운이 나고 기분은 좋았다.

그 사람 때문일까?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이루워야할 목표가 있고 행복하다는 뜻이다

이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엄마로 살아야하고  남편을 위해

난 어떻게 살아야할까 걱정도 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쉽지 않을거라는 것 잘 알고 있다.

저녁시간 퇴근 무렵에 그 사람을 만났다.

나는 말했다.

“ 꼭 내가 필요한가요? ”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 날 데려가시겠어요? ”

순간 그 사람은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림을 볼 수있었다.

“ 나 많이 부족한 사람이예요 하지만 노력할께요 끝까지...” 내가 말했다

“ 고마워요 ”

“ 하지만 시간을 두고 아이들고 가까워 지고 싶어요 ”

살짝 웃어보인다.

“ 일단 집으로 가요 아이들 보러...”

가서보니 어머님께서 아이들을 돌 보고 계셨다.

큰 딸은 집에 없었고 광주에 사는 고모네 집에 놀러갔다고 한다.

둘째와 셋째가 둘이 있었는데

엄마없는 아이들답지 않게 명랑하고 밝아보였다.

일단 어머님께서 인사드리고 아이들 이름만 묻는 정도로 낯을 익혔다.

한 두시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네 집은 반 지하 전세방이었다.

어느날, 만나서 집을 구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혹시라도 살 수있으면 지하라도 우리 집을 마련하자고...

그런데 지하는 별루라고 차라리 인천 쪽에 알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친척을 통해 알아봐달라고 했다.

지금의 우리 시동생가족이 인천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둘이 맞벌이를 하니 자주 가볼 수도 없는 처지라 부탁을 했다.

며칠 후,

아파트 분양하는 곳이라면서 연락이 왔다

한 번 와서 보라고 우리는 망설임없이 저녁시간을 이용해 갔다.

지금 사는 집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그 땐 그 평수도 어찌나 커 보이는지...

우리는 18평을 사기로 합의를 보고 그 주에 와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너무 좋아했다. 나도 행복했다.

조금만 고생하고 살자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엄마문제다 이혼을 하려해도 사람을 찾을 수없어서 고민을 했다.

일단 법률사무소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언제든지 만나도 상관없고

살아도 상관없다고 한다 하지만 호적을 정리해야 혼인신고를 하니깐 될 수있는대로

빨리 찾아서 정리를 하라고 충고를한다 이미 아이들 엄마는 자격상실이라고...

그 주 토요일날 인천에 가서 아파트계약을 끝내고 입주는 한 달있다 하기로 했다.

인천에 이사가는 동시에 새로운 가족과 만남과 동시에 내 인생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사간지 한 달쯤 뒤에 아이들 엄마를 만나 정식으로 이혼했다.

알고보니 아이들 엄마도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후 한 달후에 우린 혼인신고를 마쳤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너무 신기한 일이 있다.

아이들이 의외로 날 잘 따르는 것이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우린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어머님도 우리가 모셨다. 애초에 서울 있을 때부터 내가 모신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명석하고 착했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이제야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동안에 하나님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예비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도 여전히 서울로 출퇴근을 하면서 새벽부터 밤 12시 가까이나 돼야

집으로 들어왔다.

물론 남편은 퇴근시간에 맞춰 밤에 전철 역까지 마중을 와줬다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이사온지 3개월만에 난 임신을 한 것같았다.

난 낳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아이들한테 소홀해질까봐였다. 하지만 남편은 낳아야한다고 충고했다.

핑계를 잘도 댔다.

내가 어디로 갈까봐 걱정이 된단다. 너무 고생하는 것같아서 그런마음 먹을까봐...

직장을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침이면 전철안이 콩나물시루였고

역에서도 직장까지는 걸어서 한 참을 가야했다.

난 그러면서도 임신 8개월까지 직장을 다녔다.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니 다니는데 까지는 다니고 싶었다.


그 이듬해 1990년 난 딸을 출산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딸만 4명이 됐다.

박봉으로 아이 넷을 기르려면 힘든 일이다.

아이를 낳고 난 전자제품 세일즈맨도 하고 출판사 세일즈도 했다.

틈틈이 난 예전 옷 만들던 실력으로 우리 아이들 옷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천을 사다가 홈패션도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 딸 중 3때 우린 남편 직장관계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살게 되었다.

인천서 산지 4년만의 일이다.

집안은 많이 안정 되었고, 아이들도 별탈없이 자라주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난 눈물이 났다. 그리고 흐믓했다

큰 애는 이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을 하게되었다.

작은아이는 언니와는 한 살차이로 공부엔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해서 한참 나와 씨름을 한 적도 있다.

할 수없이 고등학교만 나와서 지금은 중소기업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이쁘기만 한 딸이고

가장 엄마를 이해하고 맘을 편하게 해주는 딸이다.

우리 셋째도 지금은 대학생이다 5살 때 만나 지금까지 나와 가장 정이 들은 것같다.

큰 두 딸들은 12살,11살 때 만나 지금까지

셋째도 21살이다. 이젠 성인이 되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저 안쓰러운 생각이 더 드는 아이다.

우리 막내 쌀쌀한 성격에 별로 말이 없는 아이다.

이렇게 딸들을 키우면서 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무척 애썼다.

물론 우리 딸들은 다 착하고 예쁘다.


 이곳에 와서 큰 아이가 대학 2학년때 IMF 위기를 맞이했었다.

아이는 휴학을 하게 되고

남편의 직장도 부도가 나는 사태까지이르렀다.

남편도 막일이라도 한다고 새벽이면 일을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난 자궁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수술이 잘 못되어서 하열을 하고

어쩔 수없이 서울에 있는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가서 다시 재 수술을 받고

완쾌되었고 거의 몇 달은 활동이 불가능했다.

6개월 정도 조리하다가

그냥 있을 수없어 파출부를 하루 2-3집씩 한 집당 4시간씩 일을 하면

난 밤중에나 집에 왔다.

그러다보니 10개월만에 팔에 무리가 와서 병원을 다니게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일은 할 수없었다.

집에 있다보니 컴퓨터를 배우는 기회가 있었다.

워드프로세서를 배우고 인터넷을 알면서 어느 주부포탈사이트에서 프로그램을 배우면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내 나이 48살

창업이라는 것을 겁없이 해보였다.

생전에 타 보지 않았던 상도 받아보았다. 내 생전에 상이라곤 밥상?

그리고 매스컴도 타 보았다.

우째? 아줌마가 인터넷하고 창업 하는일이 그리 신기한 일인감??

나를 알아보고 전화를 주는 사람도 꽤 있다.

보잘것없는 나를 인정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내가 살아온 수많은 역경속에 살아온 지금까지의 내 삶이

마치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낙비가 내린 후에 하늘에 영롱한 빛을 발하며

나타난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앞으로의 진실한 삶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