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간에 퇴근하기가 힘든 직업이긴 하지만, 여기에선 항상 제시간에 퇴근하고 있다.
5월한동안 월드컵의 열기로 모두들 회식장소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저녁을 보냈고, 6월에 들어서면서는 비가 오는날이 많아 퇴근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숙소로 가봐야 별다르게 할일도 없고해서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는 날이 많았다.
담배며 필요한 먹거리를 사다 나르는 단골편의점 가는길 외에는 이곳 지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탓에 가끔은 아파트 주변으로 산책삼아 돌아오기도 했다.
비교적 단정하게 가꾸어진 아파트 앞 공원은 그다지 넓진 않지만 구불구불하게 오솔길도 있었고, 잔디밭도 구릉을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일궈진 공원인 것 처럼 꾸며놓았다.
공원옆으로는 유채꽃밭도 있었는데, 꽃이 져버리자 다시 뭔가를 심기위해 파헤치고 있는것 같았다.
공원에 앉아 있으면 더위를 식히러 나온 가족들을 볼수가 있었다. 얼마전부터 붐이 일고 있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아이와 손을 잡아주는 부모, 나란히 걷고있는 신혼부부인듯 보이는 젊은사람 몇쌍, 팔을 힘차게 흔들며 빠른걸음으로 걷는 모자를 쓴 트레이닝복의 아줌마들. 그리고 놀고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앉아있는 벤치의 엄마.
''아~'' 몇주전 횡당보도에서 본 치마츄리닝이었다.
반갑네...... 이런데서 아는얼굴도 만나고, 내가 앉아있는 벤치와의 거리가 5미터쯤 될까?
그녀의 옆모습은 도도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웃음기없는 얼굴에 표정이 굳어있지만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것 같진 않았다. 굵게 웨이브진 머리를 흘러내리지 않게 꽃삔으로 찌르고 전혀 미동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얼핏봐선 분간하기 힘들것 같았다. 아가씬지 아줌만지.....
''오늘은 치마츄리닝 아니네.....''
이쪽으로 고개를 한번 돌렸지만, 나를 보진 못했나보다.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었을까?
가만히 앉아있다 갑자기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깜짝 놀래긴 했지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다. 계속 훔쳐 볼수 있으니까.
가끔 손을 엉덩이 밑으로 넣기도 했고, 멀리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기도 했고, 머리위 가로등을 쳐다보기도 했다. 옆모습이 참 잘생겼구나 싶었다.
코가 오똑한게 자존심도 강할것 같고, 거만하기도 하겠다. 입술선도 또렷한게 말발도 좋을듯 싶고, 이마도 시원하게 넓은것이 얼핏 남자관상인거 같은데, 눈이 잘 안보여서......
시선을 돌려 헬멧에 팔꿈치며 무릎에 보호대를 하고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뒤뚱뒤뚱 걸음마 연습을 하는 아줌마를 본다. 친구인 듯 한 여자가 손을 잡아주는데 몸짓이 훨씬 왜소해서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심어 놓은지 얼마되지 않은 듯 한 잔디가 줄을 맞춰서 자라고 있었고, 벚꽃나무는 가지만 엉성한게 한낮에는 공원에 나와있기 덥겠다하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벤치의 그녀는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흔적도 없었다. 갑자기 관찰거리가 없어져 버린탓인지 나도 그녀처럼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 보았다.
노란등아래로 안개처럼 퍼져있는 빛의 기운은 서서히 아래로 올수록 옅어지고 후광처럼 내등뒤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이다. 무대위의 주인공이 된듯 여기모인 사람들이 관객인듯 잠시 그들을 거만한 표정으로 둘러보게 된다. 내삶의 주인공은 어짜피 나이지만 벤치에서 느끼는 이기분은 뭐랄까? 지금 여기서 내가 주목받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녀도 나처럼 이런 기분 느꼈을까? 기회되면 물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미 뜨뜻해져 버린 맥주캔 두개를 달랑달랑 흔들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총총하게 별처럼 박혀있는 아파트의 불빛들을 보면서 그공간안에 혼자서 청승을 떨고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거나 텔레비젼을 시청하거나 더러는 아이숙제를 봐주고 있거나 내머리속에서는 갖가지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들이.....그러는 동안 사무실 계단에 이르렀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배에 절은 냄새가 훅 하고 풍겨나왔다. 오늘은 집에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동차열쇠를 집어들고 불을 껐다.
술집들의 간판이 멀리서 보이자 창문을 올리고 에어컨을 틀고 며칠전에 구운시디를 넣었다.
'' Hey~jude~~'' 흥얼흥얼 따라부르면서 왼쪽감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는순간, 길건너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여전히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먼곳을 응시하며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