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갈수록 초애는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고, 본인 스스로가 또한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청소년기 하면 온몸에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을 나이였지만
남의 눈에 드러나길 꺼려하는 입장에선 분출할만한 에너지도 많지
않았고, 분출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초애야! 같이 가자"
헐레벌떡 뛰어와 가쁜 숨을 내쉬던 은수는 무언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양 비밀스런 눈빛을 보냈다.
주변에서 가까운 친구가 되고자 여러아이들이 시도해 왔지만,
은수와 몇몇 아이 말고는 성공하지 못해서 초애에겐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너-, 그거 아니?"
"...."
"김현빈이란 애가 널 좋아하나봐, 내가 아는 친구가 하는 말이
그애 반에 김현빈이란 애가 있는데, 글쎄 노트 한장에 온통
민초애로 도배가 되어 있더래."
"그게, 무슨 말이야?"
"개네반 아이들이 장난하다 현빈이란애 노트가 교실바닥에
떨어졌는데, 2학년 5반 민초애 이름이 거기에 온통 색싸인펜으로
무지개색을 띄고 있더래는데..."
사춘기에 핑크빛 소문 한번 안나고 지나가기는 힘들겠지만
초애에게 있어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김현빈이 누구인진 알고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같은 반이기도 했으니 모를리는
없지만, 귀여운 얼굴에 장난기가 다소 많은 짖궂은 남자애로
자신의 고무줄 놀이를 할 때 가끔 나타나 짖궂게 해 미워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은수의 말을 듣고 지금 생각하니, 자신에게 관심을 끌려고 그렇게
못되게 굴었었나 싶다.
"창피하니까 누가 물으면 모른다 그래 알았지! 은수야-"
"왜그래,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축이라던데, 키가 좀 작아
흠이라면 흠이지만 한번 사귀어봐도 좋을것 같은데..."
"아, 글쎄 누가 물으면 모른다고 하라니깐-"
"알았어, 하면 되지 뭐"
한참 이성에 눈뜬 은수로선 신경질적인 초애가 이상하기만 했다.
호기심 가득찬 은수의 시선을 못본척하고 돌아온 초애는 말은
신경질적으로 했지만 가슴이 두근 거렸다.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에선 선머슴애 같다는 은수가
어떻게 꼭 붙어 다니나 의아해 했다.
하지만 두사람 다 남이 모르게 나름대로 친구의 성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따뜻함이 있어서 오랜 세월이 아니어도 절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어느 토요일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초애는
집앞 멀리 않은 담모퉁이에서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조그만 남자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도 초애를 보았는지 잠시 바라보는듯 하더니 골목길로
뛰어가 버렸다.
틀림없이 김현빈 그아이였다.
"무슨일이지? 우리집앞엔 웬일로..., 혹 나랑 사귀자는 것은
아닐까?"
궁금증은 일었지만 그렇다고 뛰어가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온뒤 자연은 그 싱그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일찌감치 도시락을 비운 초애는 은수와 뒷동산에 올라 벤치에
앉아 금방이라도 적셔질듯한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너무 좋다! 그치?"
"그래, 진짜 좋다"
친구의 몸을 베개삼아 드러누운 은수는 다리를 흔들어대며
마냥 좋아라 했다.
"근데 있잖아 초애야! 만약에 말야, 현빈이란 애가 너랑
사귀자고 연락오면 어떻게 할래?"
갑작스런 은수의 말에 초애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하긴, 오면 오는거지"
"그러니까, 싫지는 않다 이거지?"
"모-올라, 얘는 괜한걸 묻고 그래"
한쪽 다리를 털어대던 은수는 빙그레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종이쪽지를 불쑥 내밀었다.
"현빈이란 애가 너 많이 좋아한대더라, 후후후--
난 전해달라고 해서 전해준것 뿐이니까, 나머지는 둘이 알아서
사귀든지 말든지 해"
은수에게서 쪽지를 받아든 초애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참고,
저녁이 되어서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펴볼 수 있었다.
"안녕? 민초애!
무슨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웬지 네가 나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아 있을것 같지 않아
글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예전에 너에게 짖궂게
굴었던 걸 사과한다. 나의 사과 받아줄 수 있겠니?
받아 주었음 좋겠다.
그리고, 사실은 난 네가 좋단다.
네가 초등학교때 분단장 할 때부터 였던것 같다.
사실 처음엔 저렇게 말도 잘 안하는 아이가 어떻게 분단장이
되었을까 싶었는데, 조용하면서도 제 할일은 남에게 미루지
않고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해놓고 가는 널, 몰래 지켜보면서
너에 대한 나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아마 그때부터
였나 보다, 널 좋아하게 된것이...
그리고 괜히 널 못살게 군것이 지금은 많이 후회된다.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넌 어때?
꼭 답장 주었음 좋겠다. 안녕...
-너의 좋은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현빈이가-
편지를 읽고나니 기대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쑥스러워서 답장을 해야 할텐데, 어떻게 은수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음날까지도 초애는 쪽지를 뒤로 감춘채 어떻게 은수에게
답장을 전해달라고 할까 망설였다.
그런데 은수는 다 알고 있었다는듯 장난스런 웃음을 띠며
다가와 한손을 내밀었다.
"어서 줘? 답장 쓴 모양인데, 내가 007 가방에 잘 넣어
전해줄께"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초애는 얼른 친구손에 쪽지를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