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으로 돌아와서 A가 조인하게 될 것이란 것과 한 달 후부터는 신입사원이 충원될 것이란 것을 알렸다. L을 사수로 하고 전반적인 업무조정 사항을 지시했었다.
A에 대해서는 평판이 나쁘지 않아서 대체로 반가와 하는 분위기였다. 혹시 K가 불편해 하지 않을 까 했지만 비서실과의 잦은 왕래 때문인지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L씨가 A씨 자리하고 업무교육 스케쥴 짜서 나 한테 알려주고 다음 주부터 부서를 옮겨야하니까 짐정리 하거나 하는 것 먼저 알아서 좀 챙겨줘…”
공교롭게도 A의 출근 일에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관계로 A와 팀원들과 미리 상견례 겸 식사를 하기로 했다.
다수의 의견에 의해 정해진 전주비빔밥 집에서의 첫 점심식사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우리 팀의 구성원이 모두 여자인 것과 전문적인 업무를 한다는 것 때문에 항상 우리 팀으로 오기를 희망했다고 A가 말했다. L이 A의 사수라서 그런지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K와 A는 이미 오랜 교류가 있었던 듯 비서실의 분위기라든지 B와의 관계등을 얘기하며 서로 까르르 웃곤 했다. 점심을 끝내고 자리를 옮겨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기 팀에 대해 전반적인 브리핑을 해주고는 앞으로 서로 잘해보자고 말했다. A는 우리 팀의 분위기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고 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우리 팀으로 출근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완전히 낯선 사람과 같이 일을 하는 것 보다 아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일년의 모든 행사 중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은 여름휴가다. 한 열흘 정도를 회사에 나오지 않고 푹 쉴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남편과 시간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통상 3박 4일 정도 국내의 휴양지나 가까운 동남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었지만 금년부터는 유럽 여행을 해보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긴 시간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남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지 처음에는 싫다고 했었지만 뭔가 남편에게 기분전환도 해주고 견문도 넓혀주고 싶은 마음에 계속 졸랐다. 한참을 망설이 던 남편은 내게 영국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영국은 가본 적이 없던 터라 나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남편의 여권도 만들고 비행기표 예약도 하고 하면서 신혼여행을 준비할 때보다 더 들뜬 기분이었다.
L에게 업무인수를 어느 정도하고 나서 휴가를 위해 가방을 둘러 메고 회사를 나올 때 어릴 적 소풍 전날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남편 역시 평소보다 집에 일찍 와 있었던 것을 보면 처음가보는 영국이 몹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였었던 것 같다.
히드로 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 여기가 ‘영국’이구나 하고 감탄 했다. 뭔가 새로운 세계로 나온 것 같은 신선함이 좋았다. 일상에서의 탈출…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나도 신경 쓸 사람이 없는 장소라는 것이 너무 좋았었다고 생각된다.
대영제국의 공작이었던 Holland경의 저택을 공원으로 만든 Holland Park 근처에 위치한 호텔에서 여정을 풀었었다. 아침에 깨어나서 예전의 Holland 공작 가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잘 꾸며진 공원을 산책하고 유럽식 아침식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바쁜 런던 사람들을 한가로이 쳐다보며 여행객의 당당함으로 이곳 저곳 탐색하고 다니는 것이 즐거웠었다. 오랜만의 생기 어린 남편 모습 역시 나를 들뜨게 했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낼까하고 고민하던 나에게 남편이 선물한 뮤지컬 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내게 주었다. 뭐든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어색했던 남편은 좋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기쁘다는 것도 직접 표현한 적이 없었다. 결혼 이후 한 동안은 이런 남편의 태도가 견디기 힘들어 오히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닌 가 꽤 고민도 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한 장의 표로 ‘아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잘 선택했다’는 탄성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배우의 호흡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열린 무대, 현란한 조명, 영혼까지 정화되는 듯한 거침없는 당당한 음악, 힘있는 몸짓, 이 모든 것들에 매료되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몰랐었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벗어나 극장 밖으로 나올 때 까지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었다. 우리를 스쳐지나 가는 낯익은 두 사람의 뒷모습에 시선이 멈췄을 때까지…
그녀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던 남자의 뒷모습…어디선가 본 듯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J인가? 그럴리 없는데…’
“왜그래…”
남편이 물었다.
“아니 저…”
“뭐…?”
의아한 듯 나를 보는 남편에게 “아니 아는 사람이 지나 간 것 같은데…”라고 말하려던 그때에 그녀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너무 놀라 한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 내가 뭔가 봐서는 안 될 장면을 훔쳐보다 놀란 아이마냥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잠깐 차갑게 나를 응시하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했지만, 한 꺼번에 쏟아져 나온 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사장?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편을 말리면서 마치 뒤를 밟듯 천천히 몸을 숨기려는 듯 걸었었다. 이내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졌지만 웬지 만나서는 안된다는 불안감으로 조심조심 발길을 띠었다.
중심을 약간 벗어나 위치한 챠이나타운근처에 있던 한식당을 찾아가기로 했었다. 좀 먼 거리였지만 런던의 마지막 밤을 즐기려는 듯 피카델리 광장을 거쳐 식당까지 걸었었다. 의외로 좁은 런던의 중심부는 그 자체가 역사의 현장 그 자체이었고, 그런 런던의 밤이 싫지 않았다.
머리 속을 맴돌던 그녀와 사장이었던 듯한 남자의 뒷모습이 몹시 궁금했지만 남편과의 소중한 시간을 그런 의문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