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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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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빨간머리앤 2003-05-02

영주는 밤새 잠 한줌 못잤다.
그도 그럴것이 당장이라도 새롭게 뭔가를 한다 싶어서 하루를 지내고도 그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창준씨가 아침에 말좀 해주라'
'응? 아 어제 그거..'
'내가 말할려니 좀 쑥스럽네'
'알았어! 나만 믿어라'
식사를 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영주는 창준의 얼굴만 어른들 몰래
살짝살짝 지켜봤다.
(우씨...왜 말을 안해)
(알았어 밥좀 먹고 하자)
(그러다가 출근은 언제하고?)
말없는 두사람의 공방전이 공중에서 무수히 오고가는 와중에 이윽고 창준이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 김선생님이 아프시다구요?'
'응 뭐 감기라는데 자세힌 모르겠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헤헤'
'와 실실 웃고 그라노 말해라'
'저 영주가 교원자격증이 있는데..애들을 잠시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치..이제야 말을 하구잉)
'시끄러배..나서는게 아이야'
'예? 그게 아니구'
'말은 알겠는데 그러는게 아이야'
(엥? 뭐가..내가 그저 잠시 공백을 메꿔보겠다는데..뭐가 문제냐구?)
'아파서 힘든 사람한테 뭐 자랑하는 것도 아니구 니들은 가만히 있어'
(나 절대 남 아플때 뭐 기회다하고 자리 뺐는 그런 얍삽한 사람아니다)
영주는 괜히 나쁜 짓을 계획하다가 야단맞는 것 같아서 갑자기 밥이 목에 콱하고 걸리는 것 같았다.
창준도 더불어 괜히 머쓱해졌다.
'새사람 보래..그런데 신경쓰지말고 가만히 있거래이..'
'에(아 이게 아닌데)...'
시어머니는 새삼 영주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창준에게는 위로 결혼을 한 누님과 사법고시중인 남동생과 영주보다 두살적은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시어머니는 본인도 여자이면서 정말 여잘 하잖게 보는 경향에 속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아들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공부를 잘하는 큰딸에게 여자가 무슨?그러면서 고등학교만 보냈고 두 아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학에 보냈다.
마지막 딸 하나도 큰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로 땡칠려고 했지만 막내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몇날몇일을 울고불고 아버지한테 착 달라붙어 애걸복걸하는 통에 딸이면서도 대학을 덜컹 졸업했다.
다들 공부는 그럭저럭 했었지만 그 선생자격증인가 뭔가 하는 걸 갖는 걸 못봤던 터에 영주가 그런 자격까지 갖추고 있다고 하자 며늘애가 여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웬지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게 아니다.
남편의 한소리에 애들이 꿀먹은 벙어리마냥 있는 걸 본 시어머니는 한편 남편의 말이 백번은 아니더래도 구십아홉번은 옳다고 생각했다.
동네 아낙들한테 자랑할 한가지가 더 생긴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입이 근질근질....

영주는 아침때 그때의 그 날아갈 듯한 기분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진데 대해 너무나 허탈했다.
기대가 큰만큼 영주가 받은 실망은 회복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시아버지의 고리타분한 생각에 이렇게 맥없이 무너져야 하는건가 싶어서 그게 또 화가났다.
(너무해! 정말 너무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보래..'
'....에..아버님'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 대답을 한 영주는 뜸을 들이며 문을 나섰다.
'내 나갔다가 점심때 오꾸마'
'에(언제는 보고했나?)'
'아침에 그건 잊어버려래이'
'에'
영주의 기분이 최악임을 전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영주에게 확인사살까지 하고서 출타했다.

그날도 학교에선 애들 몇몇이(몇몇이랄것도 없다. 겨우 7명이 전부다) 운동장에서 지들끼리 축구를 하고 있었다.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서 창밖으로 내다보는 김선생의 표정은 약간 어두웠다.
마을 주민들한테 그저 감기가 심하게 걸린 것 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김선생이 이래 넋놓고 있는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에 고작 애들 몇이 있을 뿐이지만 이곳도 예전에는 조막만한 아이들로 붐비는 때가 있었었다.
김선생이 처음 교사가 되어 그 부푼꿈을 안고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그때만해도 신임교사들은 지방 소도시에 곧잘 배치되고 했었고 그런걸 당연스레 받아들였기에 낮선곳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게 크지 않았던 때였다.
모든 것이 좋았었다.
시골의 순박한 인심과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동심은 김선생의 직업관을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이 충만해졌었다.
그렇게 해서 몇년간 이곳에서 교편을 잡다가 큰 도시로 나가 교직생활을 죽 해왔지만 항상 김선생의 마음속에선 이곳이 그리워 졌었다.
큰 도회지에서 김선생은 애들 전인교육이 다가 아님을 다른 교사들과 교장들 거기에다 학부모까지 가세해서 그를 회의에 빠져들도록 했으며 그는 다른 교사들이 그토록 바라는 승진에도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승진을 쑥쑥하는 교사들이 교사같지 않게 보였었다.
그렇게 해서 근 십몇년간을 도회지에서 보내다 그는 자원해서 작은 소도시의 학교를 옮겨다니다가 이곳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젊은이가 별로 없어 학교에서 수업다니는 꼬마들이 예전만큼 없다는 소리는 그에게 희망으로 들렸다.
그곳은 선생들이 가기 꺼려하는 곳중의 하나였기에 발령받아 가고나선 몇년도 안되 빠져나오고 하다보니 이건 마치 유배지나 다름없었고 선생을 배치하지 못해 교육당국에선 그것도 큰 골치거리였다.
그런 그곳에 김선생이 턱하니 자원을 하자 모든것이 만사형통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온 이곳은 예전과 같이 김선생을 편하게 해줬다.
거기에다가 예전의 그 어린 제자들이 다 장성해서 가끔씩 고향에 찾아와 김선생에게 인사라고 하러 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랬었다.
김선생은 전혀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