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와 시아버지가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창밖에는 젊은애들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삼삼오오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별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는 영주의 귀에 시아버지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젊은것들은 안되!'
'에...뭐가요? 아버님'
'지 부모가 준걸 그대로 안하고 저봐라 저봐'
'....'
'저 머리 노랗게 하고 다니는거 안보이나 니는?'
'아아...머리염색요?'
'그래..하나같이 다 물들여가지고 에이 비기싫어'
'아버님 저도 염색한 머린데요'
'뭐어..'
영주는 옅은 갈색의 긴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영주의 말에 시아버지는 잠시 말을 잊고 어안이 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뭐 그거야 결혼전에 한건 어쩔수 없구...앞으로 안 하면 되'
하며 무슨 큰인심을 쓰듯 간단히 판결을 내리시는 거였다.
영주는 솔직히 황당무개해서 웃음이 나올뻔 했다.
'(친정아빠도 뭐라안하는 걸 가지고 터치하다니)아버님 염색하는건 그 사람의 스타일인데..누가 뭐라하는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하며 조심스레 답하는 영주의 말에 대뜸...
'스타일이구 뭐구 정도껏 해야지 난 저런게 딱 싫어..니도 알아둬래이'
'하지만..아버님도 염색하셨잖아요(뭐야..말도 안되)'
'이건 흰머리때매 한거 아이가'
'흰머리카락이 뭐해서 검게 염색한 거나 젊은애들이 노랗게 염색한거나 어쨌든 보기좋으라고 하는 건 같잖아요'
'(헉..)...'
시아버지는 정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때껏 당신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 이가 열손가락을 꼽아봐도 얼마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갓 시집온 며늘애가 아무렇지 않은 듯 얼굴에 웃음까지 띄고 자기 생각이라고 말을 하는데 뭐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감히 어른에 대한 도전으로 보여 괘심하게 여겨졌다.
'아버님...저..화 나셨어요?'
'뭐어...누가 화 났다그래..'
영주는 말은 화가 안났다고 하지만 큰소리로 역정내시는 모습이 분명 화난 모습임을 간파했다.
(치 그래도 그렇지...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화까지 내냐?)
영주도 시아버지의 노기띤 모습에 은근히 신경질이 났다.
독불장군도 아니고 뭐야..당신만 생각있고 난 말도 못하냐 싶어서
맞은편에 앉은 영주 또한 입이 한 댓발은 나온 듯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다방마담이 슬슬 한복입은 엉덩일 흔들며 다가오더니 냅다 시아버지 옆자리에 앉았다.
'아유..영감님도 며느님하고 다정도 하지예'
'(이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무슨 말씀들을 그렇게 속닥속닥 해예..내 저서 보니깐 너무 정다워 보여서 한번 와봤어예'
다방마담은 말이 없는 시아버지와 영주를 번갈아 보다가 잘 못 왔구나 싶은지 엉덩일 들고 일어나며 괜히 너스레를 치고 갔다.
'아이구..차가 다 식었겠네예'
마담이 휭하고 가자 시아버지도 주섬주섬 일어나셨다.
'가자..집에서 느그 엄마 기다리겠다'
영주도 뒤따라 일어나면서 기분좋게 점심먹고 차까지(뭐 영주스타일은 아니지만)한잔 얻어먹고서 이렇게 서먹해졌다는게 영 찝찝했다.
(괜히 말했나?..그렇다고 가만히 있음..영영 염색도 못하게..)
돌아가는 차 속에서도 둘다 말이 없었다.
시아버지는 시아버지 나름데로 며늘애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건 알고있었지만 대뜸 시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게 영 내키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차츰차츰 영주에게 가르칠 게 많다고 생각했으며 그게 그리 만만치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장 봐온 걸 정리하는 영주를 보며 시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그래..뭐 맛난거 사주더나'
'에..돼지갈비랑 커피마셨어요'
'호호..아이구 나도 갔으면 좋았겠데이'
'다음엔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래 그래 호호호'
방으로 돌아와서 영주는 음악을 조용히 틀고 노트를 꺼냈다.
시아버지-보수 중의 왕보수..
막상 적고나니깐 영주도 새삼 앞으로 무슨 일로든 시아버지와 한두번 더 마찰을 빚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이..머리아파.그건 그때가서 생각하자)하며 저녁 준비를 위해 요리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영주는 시할머니 옆에서 감자 껍질을 채칼로 벗기고 있었고 그런 영주를 바라보는 시할머니는 우습다는 듯 계속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할머니 왜 자꾸 웃으세요?'
영주도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아 저절로 웃으면서 말을 했다.
'느그 시엄만 숟가락으로 긁어서 벌써 감자 다섯갠 긁었을기다'
'아..제가 좀 느리다구요'
'아이다 처음부터 어디 다 잘할 수 있나'
'네에'
영주도 이렇게 말해주는 시할머니에게는 응석을 부리듯 애교도 잘 부리고 시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 가족사에도 말장구를 맞춰주며 척척 죽이 잘 맞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마위에서 감자를 채썰고 있는 영주를 보자 할머니가 또 웃었다.
'그리 굵게 썰면 어야노..호호호'
'그럼 할머니가 썰어주세요. 전 감자 깍을께요'
'오야 오야 이리다고'
이렇게 시할머니에게 떡하니 할일까지 안기는 영주인데도 시할머니는 그런 영주가 귀엽기만 했다.
저녁을 하고 과일을 먹는 자리에서 시아버지는 영주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시다가 한 말씀 또 하셨다.
'니 그 손톱에 색칠한거 맞재'
'에..'
'가정주부가 보기 흉타.지우래이'
'....에'
방으로 돌아온 영주는 난데없는 시아버지의 트집에 혼자서 씩씩대고 있었다.
며칠전 머리 손질을 하러갔다가 미장원에서 열손가락에 발른 메니큐어를 가지고 지우라고 말을 하는 시아버지가 너무하다 싶었다.
창준씨도 이쁘다고만 하던데...
그날 퇴근해 들어온 창준에게 영주는 툴툴거렸다.
'아버님이 뭐래는줄 알아?'
'응? 왜 야단맞았어?'
생뚱스런 영주의 표정에 창준은 불안한지 야단맞았냐고 넌즈시 물었다.
'나 손톰 지우래'
'아..그거'
별거 아니라는 듯 창준은 웃음까지 띄면서 말을 했다.
'그럼 지우면 되지..별것도 아닌 것 같고 난 놀랬잖아'
'뭐 난 그러기 싫단 말야'
'어..왜?'
'내 스타일이야! 우리 엄마 아빠도 간섭안한 거란 말야!'
영주는 창준의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태도에서 더 더욱 화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