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목련은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며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출근했을때의 사무실 분위기며 상우가 그렇게 우울해 하던일이. 왜 그녀에게 그가 그토록 말을 하지 못했는지도.
바보같으니라고! 그녀는 상우를 향해서 그렇게 소리쳐 보았다. 왜 그는 자신을 감싸기위해서 그많은 돈을 스스로 잃어버린 거라고 거짓말을 한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보라아빠에게 돈을 빌리면서까지 그돈을 채워넣으려고 한 것일까.
차라리 모른척하지. 목련은 그런말을 뱉어보았다. 그렇지만 알고있었다 만약 상우가 그랬다면 그녀는 지금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울고있으리라는 것을. 아마도 그는 그것을 막기위해서 그랬으리란것도. 그래서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워졌다. 모든죄를 그 혼자 뒤집어쓰고 짐또한 혼자 지려했으니.
핸드폰이 아까부터 요란하게 그녀의 호주머니 안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모른척했다. 지금은 어떤 전화도 받고싶지가 않아졌다. 그녀는 가까운 공원안으로 들어가서 벤취에 앉았다. 조용히 차분히 생각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쉽사리 벨이 조용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한참 울려대던 핸드폰도 지쳤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해온걸까. 그녀는 궁금함에 핸드폰 뚜껑을 열어보았다.
권상우 팀장님...
낯익은 그의 이름 세글자가 핸드폰안에서 찍혀있었다. 그리고 딱두통 음성메세지가 녹음되어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눌러서 내용을 들어보기로했다.
첫 번째 음성메세지입니다...띠-
-목련씨. 나...에요. 상우. 지금 목련씨 힘들거란거 다 압니다. 그리고 그일...목련씨가 한거 아니란거 난 알아요. 목련씨 그런사람 아니란거...알고있으니까 절대로 미안해 하거나...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나라 말에 그런말이 있대요 밭을 지날땐 절대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는...왜냐면 자칫...오해를 받을수있으니까요. 그런말이 생겼나봐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목련씨가 운이 없었던 거에요.
시간때문이었을까...상우의 목소리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목련은 두 번째 메시지를 눌러보았다.
두 번째 음성메세지입니다. 띠-
-목련씨. 잘렸네요. 또 저에요. 왜 그런날있죠. 머피의 법칙이 통하는날...그런날은 왜 뭘해도 안되쟎아요. 그런날이었다고 생각해요. 다 지났어요. 이일은 다 해결되었어요 이렇게 목련씨 힘들어할까봐 사실은 말하지 않으려던 것인데...어떻게 알게되어 버렸네요. 빨리 돌아와요. 이렇게오래 책상비우는거...좋은 회사원 아니란거 알죠. 그럼 기다릴게요. 뚜....
목련은 상우의 따스한 말에 그만 눈물이 더 쏟아져 버렸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을땐 결코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중요한것인지 깨닫지 못하니까. 떠났을때라야 비로소 그 소중한것의 중요한것의 가치와 값을 알게되는 것이다. 지금...그녀가 깨닫는 것처럼.
그가 믿어준다는 말 한마디가...지금 그녀에겐 세상 그 어떤말보다 더 힘이 되었다. 한마디의 말이 이렇게 커다란 힘이있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그녀는 가까운 화장실안으로 들어가서 눈물로 얼룩진 화장을 대충 고치고 사무실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듯 그녀는 회사원이며, 지금은 근무할 시간이었다. 그것을 잠시 그녀는 잊고 있었더랬다. 아무래도 아직은 프로가 될려면 먼거같다. 진짜 프로는 나처럼 이렇게 행동하진 않겠지. 감정을 다스리는법도 배워야하리라.
바보같이 왜 무조건 도망치기만 했을까. 왜 무조건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기만을 바랬을까. 내가 정말 깨끗하다면 양심에 비추어 거짓이 없다면, 그래서 부끄러움이 없는거라면
누구를 만나든 굽힐 이유도, 당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는데...아까의 행동에 대한 가벼운 후회가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서 당당히 걸어갔다. 상우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란 작은 멘트가 그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련은 쪽지를 클릭해 열어보았다.
-헤이, 목련씨. 자기 어디 다녀온거야, 점심시간 이후로 안보여서 얼마나 걱정했다구. 근데 무슨일있어? 표정이 별로네. 왜그래. 혼자 끙끙 앓지말고..속시원히 말해봐. 응?
경희의 따스한 말을 보며,목련은 재빨리 답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경희씨, 고마워요. 나..괜챦아요 그러니 걱정말아요.
"하하, 이거 뭡니까 오랜만에 맘좀 잡고 일좀 해볼랬더니, 여러분 경희씨랑 목련씨좀 보세요. 글쎄 근무시간에 쪽지라니...열심히 일하는 우리가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건우의 말에 모든시선이 일순간 두사람에게로 집중되고 말았다 아뿔사! 대체 그는 언제 보았단 말인가. 이에 질세라 경희가 재빨리 그를 향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여러분. 동료간에 서로 작은 말도 못전합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참 이상스럽지 않습니까. 어째서 열심히 근무한다면 우리가 근무중에 쪽지를 나누는지 어쩌는지 건우씨가 알고있을까요. 저는 심히 이부분이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경희씨 또 저한테 생트집입니까?"
"건우씨. 내가 틀린말했나요. 대체 왜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안달이."
두사람이 옥신각신 정신이 없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탕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상우가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아진걸 확인하곤 입을떼기 시작했다.
"자자...조용히 하세요 여러분. 지금은 근무중입니다. 그리고 건우씨랑 경희씨. 엘로우 카드입니다. 두분...앞으로 근무중엔 잡담은 좀 금지해주세요. 정히 하실말 있거든 조용히 나가셔서 대화하고 오시던지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죄송해요."
두사람의 미안한 얼굴을 보며 상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목련은 슬며시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침에 출근했을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악몽같은 하루였다. 목련은 빨리빨리 오늘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우는 자신의 자리로 와서 아무렇지 않은척 업무일을 보는 척했다. 다행히 목련이는 마음을 가라앉힌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던것에 감사했다. 사실 그녀가 안돌아올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그녀를 찾지못하던 순간이 떠오르자, 그는 정말 미칠거 같았었다. 그런데 돌아왔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그는 정말 그녀가 그렇게 고마웠다.
조금전 그는 할아버지와 만나고 오던 길이었다.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그에게 실망했다면서 화를 내고 계셨다. 예상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우는 막상 할아버지를 대하자, 어쩔줄을 모를만큼...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니가 무엇때문에...그애를 감싸는것이지? 나는 도대체가 모르겠구나! 그애가 뭐냐. 너의...대체 무엇이지. 왜그렇게 그애라면...니가 정신을 잃는것이냐."
"......................."
"장담하건대, 너는 보라와 결혼하는게 훨씬 좋을거다. 그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내나이쯤 살고보면 그런 것이 보이기 마련이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만나야하는 법이야. 그래야 행복할수있기 때문이지. 목련이보다는 상우야. 보라와 결혼해라. 그애가 훨씬 내게 줄수있는게 많을거야."
"할아버지. 알고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있어요... 하지만...아닙니다. 그녀는 절대 아닙니다. 그일은 정말 그녀와 무관합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어리석은...놈! 그래, 고작 네놈이 그정도란 말이지. 그것밖에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날 실망시키다니...나쁜놈!"
"죄송합니다."
"시끄럽다. 더 이상 마주앉아있기도 거북하거나. 썩 꺼지거라! 당분간은 내 너의 얼굴을 보고싶지가 않구나! 그런줄 알고 물러가거라."
다짜고짜로 무조건 아니라며 그녀를 옹호하는 그를보며, 할아버지는 실망스런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으셨다. 그는 화가나신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들을 들으며 마치 가슴에 대못이 들어와 박히는 아픔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화를 삭이지 못하시겠는지 보기싫다며 그에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할아버지의 방을 빠져나오던 길이었다. 모든 것이 정말 엉망진창이란 생각이 들었다. 할수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보라가 해버린 말들을 어떻게든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니 더 할수있다면 그날 그때로 돌아가 그 가방을 좀더 신중한곳에 맡기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할수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웠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상우는 나오면서 자신의 등뒤로 꽂히던 말을 잊을수가 없을거 같았다.
"상우야..너..설마,너...아직도 목련일 잊지못하는거냐? 사랑한다 믿는거냐구!"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한채 빠져나오고 말았다. 상우는 혼란스러움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 말씀이 다 맞는다는 것을 안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 그런말씀을 한것임도 알고 있다. 보다 더 현실적으로 조언해주신것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의 마음은 머리와 달리...그를 자꾸만 배반하려 하고 있었다.
매번 그의 이성은 감성에 지고, 안그러려고해도 이렇게 그녀쪽으로 시선이 가고...이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남남일뿐이라고 생각을 할려는데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어쩔수가 없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려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아니 자꾸만 미루고있었다.
만약 그것을 들춰낸다면 그이후, 모든 결과들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땐 어찌할것인가. 그이후 일어날 많은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주변사람들이 상처입을까봐 두려워 그는 내내 생각지 않으려했고, 외면하려 해왔던 것이다.
---------
퇴근 무렵 상우는 직원들이 하나두울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책상위를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막 일어서려니까 그의 책상가까이 목련이 다가와 서 있었다.
"왜요, 목련씨. 내게 할말이라도 있습니까?"
"저...팀장님 혹시 오늘 약속이 있으신가요?"
상우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다. 사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그는 지쳐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녀가 다가와 시간을 물어오다니...상우는 어쩔까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약속같은건 하지 않았어요. 왜요, 따로 할말이라도?"
"그럼...제게 시간좀 내주세요. 그렇게 많이는 걸리지 않을거에요. 드릴말씀도 있구..."
"그러죠. 나갑시다."
상우는 목련이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가 그도 그녀옆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는 그녀가 왠일인가 싶었지만 가보면 알겠지 싶어져 그녀가 가는길을 열심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회사앞 생맥주집. 그는 이곳을 사실 처음 와봤다. 그녀는 대체 언제 이곳을 와본걸까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벌써부터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구석의 빈자리를 찾을수가 있었다. 생맥주와 안주를 시킨후 내부인테리어를 조금 돌아본다음 상우는 목련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런데 자주 옵니까?"
"아뇨...사실은 저도 몇 번 와보지 못했어요. 경희씨랑 몇 번 와본곳이죠. 그냥 편한느낌이 좋아서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 내게 할이야기란 무엇입니까?"
"아깐...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일도 모두다요....팀장님 아니었으면 전 아마 곤란했을거에요. 막아주신거 감사드립니다. 그말이 하고싶었어요."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이 들고온 생맥주와 안주 때문에. 그들은 차거운 맥주를 들고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한다음 한모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감사하단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당연한 것을 했을뿐인데 감사는요. 그런거에 너무 부담갖지 말아요."
상우는 목련이 맥주잔을 들고 목으로 마시는 것을 보았다. 문득 동학사...그날...의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왜 하필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일까.
"왜...헤어졌습니까?"
"네?"
"용하선배랑...왜 헤어졌냐구요. 그렇게 많이 좋아했으면서. 그렇게 많이 사랑했으면서......"
"..........................."
목련의 잠시 당황한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책없이!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는 스스로를 나무랬다. 그러는게 아니었는데...은근한 후회가 그의 마음을 감쌌다. 공연히 그녀의 아픈델 건드린건 아닌가 싶어져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요 공연한 걸 질문했군요. 괜스리 목련씨만 곤란하게...미안해요. 내생각이 좀 짧았어요. 어려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요."
"아뇨. 이젠...말할수있어요 다 지난일이니까. 그리고 이미 정리된 감정이니까요. 왜냐면...저보다 더...그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걸 알았어요. 감히 저는 도무지 낄수없을만큼 두사람의 사랑이 강했습니다. 그래서..그래서 보낸겁니다. 내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고집한다는거...솔직히 별로 좋은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잘됐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물론 힘들었지만...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고 생각하는 두사람을 보면서...알았어요. 사랑에도 자리가 있다는걸. 곁에서 보는걸로도 눈부실만큼 서로를 생각해주는 두사람을 만약 상우씨도 보았더라면 지금의 내맘을 충분히 이해할수있었을텐데요"
"바보군요. 그래도 그렇지...그렇게 좋아했으면서...나로선 조금 이해가 안돼요. 솔직히...하지만 그 감정이란거 말입니다. 마음대로 안된다는걸 잘 알아요. 아무리 머리가 이성적이라고해도 이성이 감성을 앞서가진 못하는거 같아요.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그런지 안그럴려고해도 때론 의지와 상관없이 질질 끌려갈때가 많거든요. 아마...목련씨가 잘 알아서 했겠죠."
상우는 선뜻 이해할수없었다. 사랑한다면...정말 사랑한다면 잡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맞지 않을까 그래서 내사람을 만들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하는게 아닐까. 그런데 그녀는 이런말을 한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보냈노라고...
하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역시...스스로 먼저 그녀로부터 떠나온 것은 그녀에게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다른사람이란걸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녀가 사랑하고 함께하고픈 사람도 다른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니까...
결국은 같은것인가...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앞에 놓여진 생맥주잔을 들어서 목련을 향해 내밀었다. 그녀역시 생맥주잔을 들더니 잔을 향해서 힘껏 부딪혀오고 있었다. 챙. 맑은 유리들의 노랫소리가 허공에서 메아리쳤다. 그소리의 여운을 즐기다가 상우는 목안으로 거품이 이는 시원한 생맥주를 깊숙이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