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강 재민...
아무런 준비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만나는 재민은 경인에게 있어 신선한 충격이면서도 가슴 떨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재민을 발견한 건 비단 경인이 만이 아니었다.
진희와 선애 또한 강한 느낌을 풍기며 서 있는 재민을 보더니 놀란 표정도 잠시, 이내 둘이서 얼굴을 마주하고는 끼득 대는 게 아닌가!
경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리고 옆의 선애를 툭 쳤다.
[가서 자리 안내해 드려]
[니 손님이지 내 손님이니?]
새침스레 선애가 고개를 돌렸고 진희는 소리 죽여 웃었다.
[니들 계속 그럴래? 다시는 니들한테 비밀얘기 하나 봐라]
경인의 협박에 웃음을 멈추고 결국 선애가 일어나 재민에게 걸어 갔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그를 자신들의 테이블로 데려 오는 것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진희 또한 기꺼이 재민을 반기며 자리를 권했다.
[경인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주 진지한 듯 하면서도 웃음기 묻은 선애의 말에 경인은 하마터면 외마디 소리를 지를뻔 했다. 먹은 게 그대로 넘어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오늘은 저희가 한 잔 살께요. 어때요?]
선애는 재민이 뭔가 궁금해 할 틈도 주지 않았다. 놀라는 듯 하다가도 이내 재민은 선애의 페이스에 말려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반겨 주시는데 오히려 내가 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 누가 산들 어때요? 통성명이나 해요]
그들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경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진희도 선애도 그런 경인을 그냥 내버려 둔 채 재민과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그러니깐...여동생의 지갑을 소매치기한 범인을 경찰이 잡지 못하자 그 답답함에 스스로 경찰이 되어 잡겠다는 마음 이었다구요? 그것도 일류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 일로 어머님한테 먼지나도록 맞았지요. 하하하하...]
재민이 웃기 시작하자 선애도 따라서 갈깔 거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정말 용감하시네요. 그래, 후회는 하지 않으세요?]
[유감스럽게도 그 일이 제 적성에 딱 맞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어머니가 아직도 날 보면 '죽일 놈'한다는 거죠]
[아니 왜요?]
이번에는 진희가 물었다.
[장가 가기 힘들다는 게 이유지요. 툭 하면 불려 나가고 쉬는 날도 있으나마나 하니 어느 여자들이 좋아하겠냐는 겁니다. 거기다 또 장남이지... 여자들, 장남은 부담스러워 한다면서요?]
그는 말을 참 쉽게도, 그러면서도 재미나게 해 진희와 선애를 웃게 만들었다.
[그런 게 없지않아 있지만요 눈에 콩깍지 끼면 그런 거, 문제도 아니예요. 올해 몇이세요?]
[얜! 선배 친구니깐 서른 셋이지. 맞죠?]
진희의 정답에 재민은 싱긋 웃었다. 위험스런 미소였다. 경인이 가장 경계하는 그런 미소...
[안주 좀 만들어 올께]
경인이 자리를 피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재민의 시선을 경인은 의식하면서 주방으로 피하듯 들어 갔다.
[저 사람, 아무리봐도 괜찮은데?]
언제 따라 왔는지 뒤에서 나직히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외모 출중. 성격 샤프. 매너 오케이. 나무랄데가 없는 것 같아]
[그러면 니가 해]
퉁명스레 경인이 한 마디 하자 진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었다.
[니들 둘이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거 다 알아! 그 사람과 나 앉혀 놓고 머리속으론 우릴, 한 침대속에 넣고 있지? 내가 그 얘기는 안 하는건데...후회 막심이야. 심보 고약한 '땡땡'이들아!
내가 얼굴을 들고 앉아 있을수가 있어야지]
[얘, 쌍둥이가 어쩜 저렇게 다를수가 있니? 민성씨가 재민씨 반만 닮았음...재밌을텐데...]
한 남자와 세 여자.
아니, 한 남자와 두 여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의 얘기는 까페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눈치빠른 진희와 선애가 작당을 해 종업원들을 먼저 퇴근 시키고 한 테이블의 손님만 남겨둔 채 둘 또한 약속이 있다는 뻔한 거짓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저 두사람...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 안 들어?]
[동감이야. 인연이란 생각도 들고...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남자중에 어찌 첫 만남에서 경인의 남자가 될 수 있었으며 또 우연히 다시 만나겠니. 근데, 재민씨 침대에서도 아주 열정적일 것 같은데, 니 생각은 어때?]
[선애 넌 하여튼!]
둘은 낄낄대면서 하나 둘,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리로 나왔다.
참 많은 생각들이 진희의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건 민성과 자신과의 관계였다. 긴 한숨이 절로나왔다.
친구들이 사라지자 경인은 재민을 혼자 남겨두고 카운트에 앉았다. 그리고 까페를 알리는 간판 불을 껐다.
그동안 재민 또한 아무런 말없이 홀로 술잔을 채우고 비웠다. 잔잔한 세미 클레식만이 사람이 있음을 알리듯 나른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손님들이 계산을 하고 나갔다. 그러나 가장 벅찬 상대가 남아 있기에 경인의 신경은 잔뜩 곤두섰다.
가만히 눈을 들었다. 어느새 재민은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경인은 홀안의 작은 불빛 하나와 카운트 불빛을 제외한 나머지 불들은 모두 껐다. 나가야한다는 일종의 신호를 재민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재민은 반응이 없었다.
가만히 경인은 재민 가까이로 갔다.
휘훵한 도시의 네온사인을 받으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었다. 경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렷다.
[웃는 모습이...예뻐다는 소리 들은 적 있소?]
금새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 재민이 피식 웃었다.
[여기 오신 이유가 있나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그 이유라면...또 나를 내쫓을거요?]
[......!]
[잠시 앉아요...]
그가 창가에 자리하고 앉았다. 망설이던 경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맞은 편에 앉으며 재민을 가만히 건너다 보았다.
[당신이 두 친구들을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소. 화해를 햇다니...나도 반가운 기분이었소...그래서인가? 당신의 모습이 많이 달라 보이오. 부드럽고 안정되고...그런데, 아까 친구들이 나를 안다는 듯 얘기를 비춘 것 같았는데...내 얘기를 한 거요?]
피하고 싶은 질문을 재민이 던지자 다소 경인은 당황했다. 잠시 뜸을 들이며 경인은 무시할까도 생각했다. 경인은 침을 한 번 삼켰다.
[나로선 기쁘고 고맙소. 하지만 어디까지 얘기를 했는지 물어도 괜찮겠소?]
[왜죠?]
[혹시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혹, 실수라도 할까봐 묻는 거요. 최소한 당신한테 피해 주는 일은...!]
[다 얘기했으니 상관없어요]
[뭐요?]
[그리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돼요]
[당신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내가 알기론 여자들은 그런 일이 있어도 없다고들 한다는데 당신은 왜...?]
[제가 죄 지은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전 성인이고 제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요. 그리고 굳이 숨길 것도 없다고 판단했어요. 떠벌일 일도 아니지만요. 두 친구는 저한테 가족보다 가까워요. 그 애들이 그 일을 다른데서 떠벌리거나 하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은...내가 당신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우쭐하게끔 만들어. 당신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도...]
[......!]
경인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기도 했다. 시간이 멈춘 듯 경인은 재민의 깊고 진지한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지금...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녀의 음성이 떨렸다. 그러나 재민은 평온한 표정으로 가만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소, 유 경인씨. 진심이오]
[말,말도 안되는 소리...하, 하지도 마요. 우린 겨우...!]
[많이 만나고 적게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오]
그가 대신 말을 받았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당신은 내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소. 그리고 오늘 난,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사랑이란 걸 확신했소]
[저기, 재민씨...!]
[아니 내 얘기, 마저 들어요. 당신이 지금은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알아요. 강요도 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나란 인간을 밀어 내지만 말아 달라는 거요. 나와 한달만 만나줘요. 그때가서도 나란 인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좋아할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