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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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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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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BY 올리브 2002-11-10

** 절반의 실패 **


<그녀>

아이들을 위해 샌드위치를 만든다.
달걀 표면의 까칠까칠한 느낌이 좋아 몇번을 만지작거리다 물에 넣어 삶는다.
감자도 껍질을 벗기고 오이도 소금으로 겉표면을 깨끗이 씻는다.
햄을 넣을까하다가 베이컨을 렌지에 살짝 데워 잘께 썰어 놓는다.
샌드위치용 식빵을 돌려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가장자리 테두리를 자르며 생각한다.
삼각형으로 만들지 길게 네모로 만들지...
바람 한점 일지않는 호수마냥 마음이 고요하다.

탁 탁 타박타박...
발장난을 치며 현관을 들어오는 둘째의 발소리가 사랑스럽다.
나를 향해 뭔가를 내민다.
가늘고 긴 잎사귀가 일렬로 촘촘히 늘어선 것이 낯설지가 않다.
유치원 정원에서 꺽어왔다고 한다.
엄마를 위해서...
아이의 볼에 힘껏 입맞춤을 하고 잎사귀를 건네받았다.
미모사였다.
잎을 건들이면 아래로 쳐지고 양옆의 잎들이 오무라지는 현상때문에
함수초라고도 하는 감촉성식물.
어린 시절 친구네 정원에서 처음 본 이후로는
친구보다 미모사 만지는 재미에 그네집을 자주 들락거리곤 했다.
정원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잎이 오므라지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오므라지듯 했다.
그 뒤로도 산길을 지나면 혹 미모사가 있을까하고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간식거리를 내주고는
의자에 앉아 잎을 손바닥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아 보았다.
뭐가 그리 겁이 많아 조그마한 충격에도 오그라드는지 측은해 보였다.
어느새 작은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입에 빵 한 조각을 물리곤 환하게 웃는다.
웃음대신 아이를 안아 품안에 꼬옥 껴안아본다.
아이를 풀어 까만 두눈에 내눈을 맞추어 본다.
아이의 눈속에 내가 비친다.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슴 밑바닥부터 갑갑함이 밀려 차오르면서
두눈에 뜨거운 기운으로 퍼진다.
'이대로 아이들만 키울수있다면....'
그동안 남편에게 지녔던 원망과 배신감을 떨쳐 버릴수있을것이다.

아이를 내 보내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든 꽃잎같이 생기없는 입술에 마른 두뺨과
이제 제법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눈가의 잔주름과 기미를 가진 여자가 앉아 있다.
화장대앞에 놓여진 액자를 집는
여자의 손도 윤기를 잃어버리고 말라 혈관이 툭툭 불겨져 나와있다.
액자속의 남편은 처음 만났을때처럼 아직도 총각같았다.
10년의 세월을 그는 비껴간듯했다.
순간 화가 났다.
난 이렇게 늙어버리고 지친 영혼만이 남았는데
남편은 아직도 싱그러운 청춘이 남아있다니.....

남편은 원래 그랬다.
외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힘든 일은 하지않은 스타일이었다.
모든것은 집에서 다해주었다.
그래서인지 큰일이 생길때마다 그 몫은 항상 내 것이었다.
남편은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그러면 조급해진 나 자신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다.
이사를 하거나 차사고가 나거나 아이가 아파도
모든것은 내가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안으면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그 사랑을 믿었다.
그러나 사업에 몇번 실패하고난 뒤
그는 조금씩 변했다.
궁여지책으로 직장을 찾아 나가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망년회건으로 걸려온 남자 직장 상사의 전화를 불륜으로 몰고 가기까지 했다.
끝까지 추궁하여 나오는 것이 없자 나가더니
밤늦게 술을 마시고와서 때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그는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폭력이 주는 상처는 육신의 고통보다 정신의 황폐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소위 매맞는 여자들을 보고 다 이유가 있으니 맞는다고들 한다.
이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한쪽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맞는 쪽이 그 힘을 방어하지못한다는 상황밖에....
아이들을 데리고 아는 동생집에 며칠을 피해있었다.
차마 친정에 그런 몰골로 가기는 싫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는 잘못했다고 사과하지않았다.
그냥 들어오라는 전화밖에.....
그렇게라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붙들고 있는
그가 불쌍하기도 하고 증오스러웠다.
어쩌면 그때 이혼했어야 했다.
난 그렇게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눈이 귀한 이 도시에 엄청난 폭설로 도시가 마비되는 날,
집에 가기 싫다고 아빠가 무섭다는 아이를 겨우 달래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의 집에 너무 오래 폐를 끼치는게 견디기 힘들었다.
싸늘하게 냉기가 감도는 집으로 들어서면서
난 이제 나의 사랑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뒤로부터 우리 사이는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의식적으로 남편과의 잠자리를 피했고
그러면 그는 항상 입에 담지못할 욕설로 나의 과거를 까발렸다.

부부사이....
무촌이라고들 하지.
너무나 가까워서 아님 등돌리면 남이라고.....
뼈속깊이 나를 알고 있는 남편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으로
하루하루를 치를 떨면서 보냈다.
얼마나 인간이 망가질수있는가...
를 측정하듯이....
난 날카로운 송곳위에 불안한 정신을 올려놓고 힘들어했다.
잘 웃지도 않았으며 아이도 귀찮았다.
나날이 빠지는 머리카락에서 나의 영혼이 새어나감을 느꼈다.
급기야 남편에게 소리지르며 대들기 시작했다.
날 가만두라고.....
아님 죽어버릴거라고........
남편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달을 보내고 우리는 별거에 들어갔다.
누군가 그랬다.
이혼이란 '절반의 실패'라고....
인생의 반을 실패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머지 반은 붙잡아??했다.
하지만 이 실패가 나에게만 해당되고 싶었다.
그에게까지 겪게 하고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