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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꽃 속의 뱀의 혀


BY 김隱秘 2002-12-12

000 철쭉꽃 속의 뱀의 혀 000

편의점 앞에 원조소녀가 서 있었다.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나를 발견하고는 머리를 숙이는 원조소녀. 울고 있을까, 아니면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 후회하고 있을까..알 수 없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대학교에서 나오는 학생들이 히히덕거리며 지나 간다. 이모와 먹은 술이 깨는 건 나도 아마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난 원조소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하여 다가가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앞장서 걸어 갔다. 원조소녀가 땅으로 시선을 둔채 따라오는데 필경 그 모습이 가출한 딸이나 동생이 돌아오는 걸 맞이하는 부모나 오빠의 상봉 장면 같았으리라.
이제 원조소녀를 어찌할 것인가....뚜렷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위하여 무언가 편하게 해주어야 겠다는 마음은 확실하지만..

에약된 인연도 없고, 다만 한번 옷깃을 스친 것과, 이상한 자리에서 만났던 인연이 어찌 이런 상태로 발전 되어 가는건지. 하기야 사람의 인연이 처음부터 계획된 줄을 누가 알겠으랴만...
우연인줄 알았지만 그게 필연이고 필연인줄 알았지만 거기서 인연이 그치는 예를 우리는 많이 경험하며 살지 않는가.
"올라와 가방 놓고 앉어.."

현관 입구에 아직도 제정신이 들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원조는 하는 행동으로 보아 어쩌면 요즘처럼 요란한 세상에 나뒹그러진 강통 같은 아이는 아니라는 느김이 왔다.

"갈아 입을 옷은 있나..?"

원조소녀는 대답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밥은..?"
"먹었어..요"
"어디서?"
"오다가 그냥.."
"안먹었으면 내가 차려줄께.."
"밥 있어요..?"
"있지.."

그녀는 밥을 먹고 싶은 모양이다. 배가 고프다기 보다는 식당에서 먹는 밥 말고 집에서 먹는 김치에 된장하고 먹고 살던 그런 그리움 때문일거라는 나 혼자만의 판단을 해 보았다.

"내가 밥 차릴테니까 그동안 저쪽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는 오빠처럼 아니, 아버지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좀씩 풀리기 시작한다. 좀은 안심이 되는 듯 하다.
난 민아가 해 놓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김 몇장과 멸치볶음, 그리고 골목길 여자가 갖다준 총각김치를 함께 차려 거실 가운데 놓고 테렐비젼을 튼다.

"얼른 나와 밥 다 차렸어.."

원조소녀가 옷을 갈아 입고 나온다. 어디서 입던 것인지 목이 많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그녀의 키가 훨씬 커 보인다. 치렁거리는 머리와 여드름 찍힌 얼굴이 참으로 신선하다.
그녀의 표정의 많이 밝아져 있으니 덩달아 내 가슴도 무언가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아저씨도 같이 드세요..사실은 오다가 햄버거 하나 사 먹었는데..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그런데..?"
"아저씨가 차려주는 밥 먹고 싶어서^^"

모나리자처럼 얇게 미소짓는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파인다. 순전한 그녀의 모습에 내 가슴속 깊이 잠궈진 영혼의 나라 빗장이 풀리나 보다. 참 오랜만에 세미한 연민의 파문이 인다.

"어디서 오지?"
"애들하고 사는데서 왔어요.."
"어떻게..?"
"나쁜애들 아니거든요. 다 집이 없어서..."
"그래 어디 간다고 했나?"
"삼촌를 찾았다고 했거든요.."
"그럼, 내가 삼촌이란 말이지..?"

그녀는 밥을 떠 넣으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변변치 못한 음식을 맛나게 먹는 그녀가 정말 네 조카 같기도 하고 딸 같기도 하고...

"설겆이는 제가 할께요.."
"그래, 알았어. 밥은 내가 하고 설겆이는 거가 해. 근데 이름이 없으니까 불편하네 그지?"

나는 좀 수다스러워지고 싶었다. 그녀와의 벽을 좀 헐고 싶었다. 좀 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정말 삼촌이 되고 싶었다.

"이름..제 이름요. 예나에요. 본명이요.."
"본명? 그럼 예명도 있나?"
"있어요..아저씨들한테 쓰는 이름.."
"뭐지?"
"다음에 알려 줄께요..우선 예나라고 불러 주세요. 이 예나.삼촌 한테만 첨으로 알려주는 거예요."
"이름이 특이하네 누가 지어 주었지?"
'네, 저희 외할머니가 교회의 집사님이었대나 권사님이었대나 그랬어요. 예수의 예 자하고 나라의 나 자라고 했거든요"

설겆이를 마친 예나는 귤을 찾아 내어 가지고 와서는 까고 있다. 손이 너무 곱다. 야리한 손과 긴 손가락 끝에 색칠한 손톱이 아이인 것도 같고 처녀인 듯도 하고..
치렁대는 드레스사이로 잠깐씩 드러난 피부가 정말 복숭아 색 같기도 하고 덜익은 과실이 풍기는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봄기운 가득한 동산의 일어오르는 초록 냄새요 함성이다

자꾸 격동하려는 감정을 억제하고자 담배를 하나 갖고 배란다로 나간다. 유리문 밖을 본다. 사람들이 대개 쌍지어 지나 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재잘거림이 즐겁다. 담배 연기를 뿜어 낸다.
잘 해야지. 정말 잘해야 돼. 쟤는 네가 보호해야돼. 어린애잖아. 흑심 품지마. 원조교제 생각도 마. 알았지? 맘 속의 양심인가 아니면 근근히 살아 남은 마지막 보루인 도덕성이 외치는 소리인 듯도 했다.

"삼촌, 귤 드세요"

삼촌... 난 유리문 안쪽에서 나를 부르는 예나- 원조소녀를 바라 보았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겨 날 수 있는 것일까..소녀는 나를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참으로 참으로 알 수 없는 만남이었다.
민아가 가고, 이모가 가고나서 왜 난 그 애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을까..그렇다면 원조소녀와 만난 연구소의 시간 이후 내 가슴에는 그녀가 살고 있었던걸까..? 아니면 인연이나 숙명이라는 굴레가 예나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것일까...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전생의 인연..

"자, 우리 먹자. 그리고 푹 쉬어야지..."
"그래요 삼촌, 오늘은 제가 삼촌 즐겁게 해 드릴께요.."

난 깜짝 놀랐다. 즐겁게...즐겁게..나를 즐겁게 해 준다고..
이게 아닌데.. 난 머리를 흔들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입까지 올라 왔다.

"삼촌, 뭘 그렇게 찡그려요. 대충 생각하세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응, 그래, 알았어. 어서 먹자..응"
"삼촌은 참 어린애 같아요. 처음 보았을 때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삼촌은 저하고는 영 다른것 같아요.."
"뭐가 달라?"
"그냥요.."

무엇을 다르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쁘다는 표현은 아닌 것 같았다.

"삼촌, 나 안아줘요. 참 좋으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응... 안아줘..?"
"네, 저도 안아 드릴께요. 태워도 주고 뭐든 다 할래요ㅎㅎ"

난 여우에 홀린 것처럼 황당해 졌다. 그러면 예나는 몸을 팔러 왔단 말인가..원조교제..?
내 계산(?)과는 영 맞지 않지 않은가. 불쌍해서 그냥 여기와서 살으라고 한건데.. 그렇다면...

참으로 예나와의 사이에 큰 벽이 있음을 느끼는 순간 마음 속에 기대했던 꿈의 장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밤이 지나면 나팔수의 트럼펫 소리를 따라 새벽도 오건만 나에게는 새벽은 아직 멀었단 말인가..예나의 얼굴을 쳐다보니 예나는 아이가 아닌 에덴동산에서 타락을 부추기던 뱀이라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살구꽃이 피는 고향의 언덕에 뒤따라 피던 철쭉꽃 입술 속에서 예나가 뱀의 혀를 하고 날름거리고, 실망의 벌판에 기가 빠진 내가 홀로 떨고....
시계는 밤을 자꾸 돌리고...안개가 모여들고 불빛은 사람을 잡아 먹고
정말 난 피투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