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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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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속의 포옹


BY 김隱秘 2002-12-07

민아는 열심히 봉사를 하였지만 난 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내고 말았다. 햇살이 서산으로 시계바늘처럼 누우려 할 때 우린 우성보육원을 떠나야 했다. 연주의 청초한 미소와 봉사하는 아가씨의 순절함이 너무 세상에 찌든 나를 찌른다.

인생이 다 다르구나. 저렇게 맑고 청아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나와 같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더기를 파먹는 오소리처럼 사는 인생이 있고...
연주와 같이 영혼이 성숙하지는 못해도 말고 고운 가슴의 깊이야 어디 성자에 비하랴..

차에 오르는 우리를 향해 연주는 보이지 않을때 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왜 내 가슴이 이다지 애리고 서러운지 몰랐다. 이제껏 살면서 여자와 헤어지며 한번도 이다지 가슴이 찢기는 아픔과 애절함을 느끼지 못했건만 연인도 아니고 잠시 잠깐 만난 미숙한 처녀 연주가 내게 무어란 말인가...

"오빠, 눈오네"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를 앞질러 비포장 도로에 눈이 살며시 내려온다.

"눈은 세상에 착한 마음이 모여 하늘로 올라 갔다가 내려 오는거라는데.."
"누가 그래..?"
"응., 내가 ㅎㅎ"
"오빠, 역시 낭만적이다. 우리 저기다 차 세워 놓고 눈좀 감상하고 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겨 했다.

눈도 함박눈이어야 마음이 고와진다. 솜처럼 목화송이처럼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을 걷는건 정말 낭만의 절정이다.

"오빠, 손.."

나는 민아에게 손을 주었다. 보드라운 피부에서 감지되는 체온이 참 온화하다. 그 손잡은 자리로 떨어지는 눈 송이가 녹아서 물이 된다.

그래, 착한 마음이 녹으면 사랑의 물이 된다지. 물이 녹아 모여서 작은 옹달샘의 새끼붕어를 키우다가 넘쳐나서 개울이 되고 강이 되었다가 바다로 간다지...

민아와 난 논둑아래로 내려 섰다. 벼의 남은 뿌리가 도투락거리는 논 배미에 눈이 쌓인다. 그 위에 발자욱을 내며 우리가 걸어간다. 민아와 내가 거리낌 없는 한쌍의 비둘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비둘기가 아니라도 좋지. 참새도 좋고 멧새도 좋고 박새라도 좋고 굴뚝새면 어떨까..

"오빠, 참 좋다, 나 안고 돌려줘"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았다. 민아의 살이 나에게 온기를 전한다. 그의 부드러운 동산에 내 가슴이 부딪치면 진한 율동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하고 싶다는...꼬옥 소유하고 싶다는...

"오빠, 뭐라고 말해줘 봐"
"뭐라고..?"
"옛날처럼.."
"옛날처럼..?"
"응, ?x날에 그랬잖아 지금처럼 나를 돌려 주면서..
"뭐랬는데..?"
"이걸 그냥 그랬잖아 그러면서 내 이마에 꿀밤주고 나서 호 해준다고 입맞추고 그랬잖아.."

그랬다. 내가 그랬었다. 민아에게 그랬다. 너무 예뻐서 감당할 수 없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그랬었다.

눈은 좀더 돋운다. 발자욱이 깊어진다.

"오빠, 이제 가자 차 안에서 좀더 보고갈까..?"

난 그러라고 했다. 마음이 부르르 떨렸다. 충동적으로 난 민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차로 향해 그를 안고 간다. 옛날 보다 많이 무거워 졌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부끄러워 하거나 어색해 하지 않고 허리를 꼬옥 안고 눈을 감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우리의 운명은 언제부터 우리를 미련의 강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게 했을까? 헤어져서 각기 가정을 꾸려야 할 우리가 왜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만나도 될 환경에 처해 있을까..참으로 운명을 지배하는 그분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물어 보고 싶었다.
눈은 잔바람을 조금씩 불러 춤을 추기 시작한다.

"민아, 우리 춤출까?"

나는 민아를 내려 놓았다. 차는 벌써 하얀 눈외투를 뒤집어 쓰고 거기 서 있고 우린 춤을 추기로 했다. 눈눈눈 하얀 눈이 오는 우성보육원 저 아래 논벌판이 펼쳐진 곳에서 우리는 유희를 시작 했다.
어린날의 민아의 얼굴이 되살아 나고, 나도 차츰 어린 시절 천개동 아래 논배미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정말 그리운 산이, 그리운 강이 우리의 눈속에 비쳐지고 왠지 뭐가 허전해서일까 눈물이 흐르는걸 서로 닦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