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경과 민규의 옛 이야기
열일곱의 가을이었다. 그 날도 은행잎이 온 천지를 황금색으로 수 놓을 때 고교 3년생의 민규를 고교 1년차인 나, 희경이 만난 것이다. 커피숍에서였다. 은근히 내숭쟁이인 나와 화끈한 터프걸인 은영, 다소 새침떼기인 정아. 도서관 대신 나이트를 가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우리에게 다가온 민규는 문제를 내면서 맞추면 커피값을 내겠다고 했다. 동전 네개로, 두번의 삼각형을 만든 후 다시 원상태인 사각형으로 돌려 놓는 방법. 너무나 쉽게 내가 맞추었고 민규는 싱긋이 웃으며-나중에 안 사실인데 민규는 내가 맞출 것이라고 그의 친구들과 내기를 했단다-커피값은 물론이고 그날 하루를 책임졌다.
신나게 놀고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민규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건네면서 내 번호까지 뺏아 갔다. 민규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은영은 기꺼이 나를 밀어 주었고 정아는 질투로 입을 삐죽거렸다. 정아 또한 첫 눈에 민규를 점찍었다는 걸 나는 그 때 알지 못했다. 알았다한들...글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던 내가 무사히, 기대 이상의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민규 덕분이었다.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내 공부를 봐주고 고3의 찌증과 신경과민을 민규는 무던히도 받아 주었었다. 입영 영장이 나왔어도 나로 인해, 나를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미루고 미루었다. 그 애정에 감격한 나는 합격을 통보받던 날, 민규에게 나를 주었다.
사랑한다고...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내 귀에 뜨겁게 속삭이며 긴장으로 굳은 내 몸을 참으로 따스하게 어루만져주고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게 해 주었다. 공공연히 우린 연인이 되었다. 그것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행복한 그 만남에 언제부턴가 정아의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조심하라는 은영의 충고에도 나는 웃어 넘겼다. 민규는 나에게 있어 절대 믿음의 대상이었고 늘 나와의 섹스에 목말라 하면서도 따스한 눈빛으로 정도를 지키는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 1년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 학기를 맞았다. 인생, 사랑, 학점. 그 모든 게 완벽하다고 믿었다. 실수는 바로 그 완벽에서 온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성숙이 무르익은 가을 날.
은영과 함께 민규 자취방을 찾은 나는 아련한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벌거벗은 남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러면서도 몹시 낯설어 보이는 남녀가 좁은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한 장면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읽은 듯 나는 뒤돌아 나와야 했다. 소리치는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미친 듯 거리로 뛰어 나와 아무 차에 올라 탔다.
알몸의 민규와 정아의 모습이 끔찍하게 보였다. 벌거벗고 민규에게 안겨 장난을 치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더 끔찍하고 소름끼쳤다. 소리없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시간을 세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까만 어둠이 보호막처럼 나를 감싸고 있을 때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은영이었다. 말없이 안아주며 대신 울어 준 사람은 은영이었다.
그리고 친구라고 믿었던 정아가 당당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민규와의 관계는 오래 되었으며 그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나더러 포기하라는 점잖은 충고를 늘어 놓았다. 나대신 놀라고 고함치고 손찌검한 은영을 보며 정아는 빚 진거 갚는 셈 친다고 했다. 울며 메달리는 어리숙한 짓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정아의 말에 머리라도 쥐 뜯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는 나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나는 긴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그래서 앓아 누웠다. 몇 날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고 눈을 뜬 나는 고약한 소리를 들었다.
희경아...여기 병원이야 이 바보야 너 유산했어 무슨 소린지 알아 들어? 며칠 안정을 취해야 된대 바보야 어쩌면 좋니...어쩌면.
살을 에이는 듯한 아픔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는 순간에 나는 또다시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 났을 때 내 내면의 무언가가 이미 죽은 후였다. 머리속이 텅 빈 듯, 그러면서도 갈끔히 정리정돈된 듯한 기분 속에서 며칠 속앓이를 하고 있을 때 민규가 찾아왔다. 미안하다며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민규를 포기했다. 민규와 함께 꿈꾸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민규가 나를 놓은 게 아니라 내가 민규를 버린 것이다. 다시 나를 찾으면 죽어 버리겠디고 했다.
그 길로 가요방에 가서 <THE ROSE>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리고 다음 날로부터해서 민규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지우기 시작했다. 휴학계를 내고 시골로 내려갔다. 당분간은 내 존재를 무시하기로 했다.
내 스무살의 가을은 그렇게 슬픔으로 다가왔다.
희경은 배 속에 아이가 있기라도 한 듯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표현 불가능한 아픔이 몸속을 휘저었다. 아이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아이를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희경은 자신과 민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무리없이 과거를 떠올리는 게 얼마만인지...
하지만 민규를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