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여자(5)
누구라도 머릿속에 맴도는 이론대로만 살 수 있을것 같으면 후회나 실수나 반성이라는 말 같은건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겠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신처럼 완벽할 수 없기에 항상 같은 실수도 반복하면서 살고, 그래서 생기는 뒷 일에 대해 후회와 반성도하며 사는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아랫집 여자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론을 그녀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김말자씨 앞에서 말이다.
'유아는 어떤 곳에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모두 이해해주고, 보듬어 줘야하는 존재이며, 이유를 막론하고 어떤 폭력에도 노출 되어서는 안된다.'
김말자씨가 첫애를 낳고 처음으로 샀던 자녀 양육서의 주요 내용으로 신참내기 엄마가 지켜야 할 일은 단 한가지- 아랫집 여자가 방금 제시한 이론, 아기에 관한한 이유를 달지말고 무조건 사랑하라 였다.
하지만 이론상으론 그렇게 간단한 내용을 막상 실생활에서 실천하기란 그리 만만치가 않았는데,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연애시절 술자리가 있다며 참석하는 남편의 저녁밥을 먹었느냐 안먹었느냐 챙기는 정도의 모성애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으며, 하루 저녁 술에 취해 전화 한통없이 외박하는 남편을 용서하는 정도의 아량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런 일이라는걸 깨닫기 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크고 깊은 모성애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있는 지금, 이 순간 조차도 오늘처럼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일들로 인해서 턱까지 차오는 노여움을 속으로 삭이지 못하는 못난 엄마가 되어버리고 나면 '이론은 이론일뿐 실전이 아니다'는 말만 되뇌이게 되는게 인지상정인 법이다.
'아기에게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것이 참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현명한 길이다.
살다보면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대로 모든일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유아 자신의 작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하고, 그걸 긍정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것이, 부모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인해 언젠가는 유아 자신에게 닥쳐올 인생의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속에 묻혀 버리게 만드는 것보다 백배는 더 현명한 처신이다..'
이것은 처음 구입한 양육서의 말이 전혀 실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가 다시 서점에 가서 구입한 두번째 양육서에 적힌 내용이었다.
이 책에 따르자면 엄마가 할 일은 그저 자녀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말고 때로는 좌절을 시킴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것을 하지 못할때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걸 극복해서 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이었는데, 김말자씨는 처음 구입한 책 보다는 훨씬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부모도 인간인데 어떻게 아이들이 해달라는 모든것을 다 해줄수 있느냐 말이야. 학교에 들어가서도 졸졸 따라 다니며 다 해 줄 수 없을바에는 아예 일찌감치 인생이란 그리 만만하지도, 니 고집대로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라는 걸 일깨워 주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그녀의 생각과 맞물리면서 '세상에 이렇게 좋은 양육서가 있나?'는 생각을 금치 못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배풀라는 말보다 훨씬 쉬울것 같던 그말이 김말자씨에게서는,아니 그녀의 아들 경훈이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것이었다.
좌절을 알게하라. 그리고 더 나은 길로 인도 하라....
그 말을 신조로 삼고 살기 시작하는 순간 부터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왜냐...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배풀어야 할 때는 김말자씨의 속만 숯검댕이가 되고 나면 적어도 경훈이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좌절을 가르쳐야 하는 그 순간부터는 엄마 입에서 '안돼'의 '안'자만 나와도 벌써 입부터 삐죽거리고 울어대는 경훈이도 경훈이지만, 그보다도 애기를 좌절을 시켜 놨으니 그 좌절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울며 보채는 아들녀석이 제풀에 죽어서 울음을 그칠때 까지 지켜 보고 있어야 하는 김말자씨 또한 감당하기 힘든 인내력과 자재력을 발휘 해야만 했기에,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 '경훈이나 나나 감정이 좀 수그러 들때까지, 그래서 좌절을 받아 들일수 있을때 까지는 무관심 해지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주위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게는 시댁 부모님부터 가깝게는 동네 친구들까지 애가 우는데 돌아 보지도 않는다며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건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가 응석을 받아 주지 않으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 불쌍해보이는 시선을 던져가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경훈이를 보고는 그냥 그곳을 지나가던 전혀 모르는 아주머니나 할머니까지 달려와서는 애를 얼러주는 통에 의도는 의도 대로 빗나가버렸고, 경훈이는 경훈이 대로 남보다도 더 못한 엄마가 한 없이 원망스러워 눈을 흘겼으며, 김말자씨는 김말자씨 대로 '내 인생에 이건 너무 심한 테클이야'를 외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번째 양육서도 실패를 하고 말았다.
의도는 좋았는데 순전히 주위의 분위기가 애를 그렇게 기르게 놔 두지 않았기에 그녀는 다른 양육법에 눈을 돌렸었다.
가히...
현대의 출판기술은 하루 저녁에도 수십권의 양육서를 출판해 낼 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동네 서점을 뒤져 새로 나온 양육서란 양육서는 다 사다가 읽었다.
아마 동네 서점 아저씨가 그녀의 독서력만으로 그녀의 직업을 가늠해 보라면 분명 문제아들만 수십명 모아놓고 돌봐 주는 수용소 선생님쯤으로 보지 않았을까...싶다.
하지만 그렇게 뻔질나게 책을 사 읽으면서도 이렇다 할 맞춤 양육법을 찾지 못해던 그녀는, 대충 이것 저것 섞어서 맘에 드는 것만 골라 그녀 나름대로 이론을 적립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버릇없고 고집불통인 자녀를 자랑스러워 할 부모는 없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가 다른 모든 이에게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만큼 그들의 행동이나 사고 방식 또한 똑바르고 건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부모의 바람이 한결같다고 해서 그들의 자녀 또한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획일적인 애들로 자라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 또한 나의 자식들이 다른이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라지만 가끔은 제 의사를 확실히 밝힐줄 아는- 나 아닌 다른 이가 보기에 아주 형편없는 방법만 아니라면- 그런 아이로 자라 주길 바랄 뿐이다.
다만 어쩌다 한번씩와서 잠깐씩 보고 가는 사람들은 절대 찾아낼 수 없는 내 아이의 장점이나 단점, 그리고 작은 버릇조차도 낱낱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아이의 부모이기에,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똑같이 느끼고 행동하지 않는다고해서 심하게 비난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그건 틀렸으니 바로 하라고 윽박 지르거나, 종용 하지도 말고 가야할 길에서 너무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자녀의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 또한 현명한 방법일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부모가 믿어주는 만큼 자라니까.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그 말에 담긴 참 뜻을 가슴으로 느낀다면 말이다.'
"왜 말이 없어?"
한참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아무 말도 없는 김말자씨를 보며 아랫집여자가 말을 걸었다. 혜정이가 옆으로 뒤척이는 바람에 떨어질 뻔 해서 급하게 애를 붙드는데 고구마를 들며 그녀가 일어선다.
그리고 허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 주정꾼이셨어.
술만 드시면 집안 물건이 남아나는게 없었을 정도니까."
"....."
갑자기 자기 가족 얘기를 꺼내는 통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던 김말자씨는 등을 보이고 서있는 그녀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렇게 지긋지긋 하던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시고 나면 하나도 안 그리울것 같던 그 아버지가, 요즘 한 번씩 생각이나.
한번은 내가 많이 어릴적에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다는 전화를 받고 엄마랑 같이 병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도 술을 많이 드셔서 집에 오시는길에 육교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닥으로 구르셨다는 거야. 다리가 골절이 되셔서 신발이며 바지며 온통 시뻘건 피 범벅인데 그 와중에도 손에 든 종이 봉투를 놓지 않아서 간호사가 뺏을려고 하니까 '우리 순자꺼다, 손대지 마라'면서 어찌나 무섭게 호통을 치던지 수술실에 들어가서 마취를 시키고 나서야 겨우 빼낼수 있었데. 그러면서 전해 주던 고구마가 그때까지도 온기가 식지 않고 있었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우리 아버지...
그렇게 매일 술먹고 폐인처럼 살던건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아버지하면 그 고구마 생각만 나는게...
누가 그랬더라? 머리가 나빠서 잊어버렸는데 자식들은 그 부모가 살다간 인생은 기억하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해 주었던 모습은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고... 내 생에 단 한번 그 어린 나이에 받았던 사랑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걸 보면 아마 이말을 했던 그 사람도 어려서 나같은 기억이 있었던가 봐.
그 말이 정말 이라면, 자식 기르는 동안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어. 저희가 바라는게 있으니까 싫어도 좋은척 하는게 아니라, 엄마가 주면 주는대로 웃어주고, 사랑해주고...
자랑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서 그런지 마땅히 물어 볼때도 없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애들 기르는 지침서 같은책 참 많이 사서 읽었거든. 그런데 그 당시에는 다 맞는것 같던 말들이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닌거야.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들은 벌써 제 할일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다 커버렸고, 정작 아무 조건없이 사랑해줄수 있었던 시기는 저 만큼 멀어져 버리고 말았지.
누구라도 조금만 일찍 그얘기를 내게 해줬었다면... 그래서 내 마음에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각인으로 남아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만 더 빨리 일깨워 줬었더라면 평생을 두고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을, 어줍잖은 전문가 흉내나 내며 애들에게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려고 그렇게 애쓰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진 않았을텐데...
내가 그렇게 못 해봐서인지 길거리에서건 어디서건 애기 엄마들이 가슴에 폭 묻힐 만큼 조그만 애기들을 안고, 입맞추고, 볼 부비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서 그것 만큼 예쁜 모습이 또 있을까싶은게 정말 부러워 죽겠어.
우리 애들도 어려서부터 내가 항상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이나 표현을 했었다면 아무리 머리가 굵어진 지금이라고 해서 그렇게 못할 이유도 없겠지만, 돌아보면 애들이 어릴때 내가 얼마나 짜증을 부리고 내 인생 타령만 했던지 이제와서 내가 그렇게 한다는게 나 조차도 어색해서 선뜻 애들에게 다가서 지지가 않아. 그리구 내심 애들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구해서...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 갈수만 있다면 적어도 우리 애기들 기억속에 자기들을 아주 귀찮아 하던 엄마라는 생각 만큼은 지워 주고 싶은데... 어림도 없는 소리겠지?
너무 늦었어, 그래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효도 못하는 것만 마음 아픈게 아니라 눈앞에 버젖이 두고도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자식들 가슴에 평생 남을 기억하나 심어주지 못한 것도 지나고 나니까 가슴치고 통탄할 일이더라구...
그러니까 경훈이 엄마도 나처럼 실수 하지말고 해 줄수 있을때 많이 사랑해줘요. 책에서 떠들어 대는 이론들이 영혼이 살아 있는 내 아이보다 더 소중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다시 햇살 속으로,시장의 인파 속으로 걸어 나갔다.
김말자씨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맘에 없는 말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비웃었던 김말자씨에게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가슴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그녀.
이렇게 짧은 소견으로 그녀를 본 자신이...그럴수도 있겠다...
순간, 하얀 햇빛속으로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에 눈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