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죽었다. 그것도 어른들 얘기로는 누군가에게 총을 맞고 갑자기 죽어 버렸다고 했다. 어떻게 대통령이 죽을 수가 있나, 죽음의 개념을 아직 잘 모르는 우리들도 잘 이해 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은 대통령이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대통령은 그 사람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덜컥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되는 것인가. 대통령이 없는 나라와 있는 나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나. 작은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 할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대통령이 죽어 버렸다고 해서 우리 에게 무슨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내가 6학년이 되면서부터 장사를 시작한 엄마는 새벽부터 물건을 떼러 가야하고 노전을 파하고 집에 오면 공장에서 잔업을 할 때 보다 더 늦게 집에 오고는 했다. 아버지도 여전히 새벽 여섯시면 일터로 갔고 늦가을 저문해가 꼴딱 져서야 집에 왔다. 아버지 말로는 시내에 군인들이 득시글거린다고 얘기를 했지만 변두리 공장 동네는 예외여서 우리는 아버지의 얘기도 귓등으로만 들었다. 다만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국상이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대통령이 서거하셨으므로 우리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하여 학교를 당분간 쉬는 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정확히는 기억 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일주일쯤 학교를 쉬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갑자기 죽어 버리자 우리는 심심해졌다. 학교를 가지 못 하니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데 고무줄놀이나 오징어땅도 하루 종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이제 공장을 안 가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된 엄마의 귀에 들어 갈 까봐 성당 옆 만화방에도 갈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커다란 향로에 연기가 올라가는 그림만이 나왔다. 향로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하얀 국화꽃을 가득 실은 버스가 넓은 길을 따라 천천히 어딘가로 가고 있는 그림이 나오고는 했는데 그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다. 길 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버스를 향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흔들어 대고는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이에리사가 세계탁구를 재패하고 돌아와서 꽃다발을 목에 걸고 팔을 흔들면서 넓은 길을 따라 달려가던 장면과 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색색의 종이가 하늘에서 휘날리면서 떨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이에리사를 환영하던 장면과 많이 닮아 보였다. 내 눈에도 길에 선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발칙하게도 나는 그것이 하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문 안 사람들에게는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 집의 주인인 계란 집 할머니가 병이 든 것이었다.
그전부터 몸이 안 좋아서 자주 눕던 할머니는 지난 봄 갑자기 혼절을 하여 막내아들에게 업혀서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 계획에 없던 종합 진단을 받은 할머니는 수술을 하고 봄과 여름내 병원에 있다가 시월이 들면서 퇴원을 했다. 가끔 며느리나 막내아들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팔에 링거 병을 꽂은 채로 대문 앞에 있는 그 먼 화장실까지 다녀오고는 했다. 처음에는 링거 병을 받쳐 들어주고 부축을 해 주면 숨을 하닥거리면서 천천히 한걸음씩 걷더라도 화장실을 다니던 할머니는 나중에는 양쪽에서 부축을 해도 잘 못 걸을 정도가 되었고 마침내 대통령이 죽었을 그 무렵에는 아예 화장실을 갈 수 없을 만큼 안 좋은 상태가 되었다. 국밥집 미현이 할머니가 임꺽정이를 닮았다고 한 맏아들이 거의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멀리 다른 도시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작은 아들도 주말마다 어머니를 보기 위하여 왔다. 명절에만 다녀가던 세 딸들도 사흘이 멀다 하고 다녀갔다. 그렇게 계란 할머니의 많은 자식들과 며느리에 사위들이 차례로 들어서면 할머니의 철없는 막내아들은 마당가에 나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멀거니 대만 남은 해바라기 꽃을 쳐다보거나 했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도 교련복이나 체육복을 평상복처럼 걸치고 다니는 그는 아직도 얼굴에 여드름이 가시지 않아 소년처럼 보였다.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늘 주머니 속에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하모니카를 넣어 다니면서 아이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불어주었다. 특히, 잘 부는 곡은 미국 작곡가 포스터의 민요 ‘오, 수잔나’ 라든지 ‘기러기’ 같은 곡들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곡이라 신이 나서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따라 부르고는 했다. 아이들이 신나하면 그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원하는 대로 ‘나뭇잎배’나 ‘가을밤 외로운 밤’ 이나 ‘동무생각’ 같은 노래들을 하모니카로 반주해 주었다. 그러면서 내 착각인지 모르지만 가끔 눈물을 닦기도 했던 것 같다.
십일월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 가려고 대문간으로 나간 나는 못 보던 붉은 등이 대문에 걸린 것을 보았다. 계란 할머니의 아들들과 딸들이 탈색되고 낡은 흰 옷들을 입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