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흔히 보릿고개라고들 기억하는 2월은 나의 기억 속에도 보릿고개로 기억에 남아있다. 겨우내 많지 않은 날짜를 일을 하더라도 엄마는 급료가 제 날짜에 나와 주기를 바랐다. 어찌 되었거나 엄마의 급료는 한 달 꼬박 일해도 그다지 높지 못 했고 아버지의 급료가 나와야 설을 쇨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급료는 대개 전해 12월부터 혹은 11월부터 밀려서 설이 가까울 때 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이든 일을 한 만큼 제 달에 받고 싶은 것이 일 하는 사람 마음인데 돈을 주는 쪽은 입장이 다른 것이어서 모아서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날씨가 추워지면 공사가 지연되기 마련이고 공사가 끝나지 않으면 돈을 줄 수 없다는 원청회사의 입장이 있고 그라고 무슨 돈이 많을 리 없는 하도급 업자들도 입장이 난처하기는 마찬가지라 사람 좋은 아버지는 돈을 받으러 갔다가도 남 하소연만 실컷 들어주다가 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돈을 받으러 다녀오는 날은 아버지는 꼭 약주를 했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마시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세상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는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 그 순간을 잊고 싶어 했다. 방이라고 여섯 식구가 부챗 꼴로 누우면 꼭 맞는 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와서 방 한 가운데 턱 누워버리면 엄마의 바가지가 시작된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속상해도 욕을 잘 못하는 엄마는 그만 아버지의 양말을 벗기고 우리들 자리를 깔아 주면서 악만 써 댄다. 우리는 새우모양 한 구석에 모여서 잠을 잔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그 와중에도 아버지를 위해 콩나물국을 끓여놓고 출근을 했다.
내일이면 설이다. 엄마는 얼마 안 되는 보너스로 장을 보아서 좁은 부엌에 앉아서 전을 부쳤다. 방 한 구석에는 초저녁에 해다 논 가래떡이 자리를 턱 차지하고 있다. 밤은 깊고 간간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올 때 까지 버틸 거라던 동생들은 벽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잠에 빠졌다. 부엌문이자 우리 집 대문인 판자 미닫이가 삐걱 끽 하고 조금 흔들렸다. 나는 턱을 방과 부엌 사이의 문틀에 걸쳐두고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 번 더 끽 달칵 하더니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어깨의 눈발을 털면서 들어선다. 아버지 뒤로 캄캄한 세상에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미희 안 잤나? 하고 들어선 아버지는 손에 든 봉투부터 엄마를 향해 내 민다. 아버지가 들어서는 것을 힐끗 돌아 만 보고 그냥 하는 일을 계속 하던 엄마지만 이때쯤엔 손을 내밀어 아버지가 건네는 봉투를 받는다. 그리고 퍼뜩 열어 보고는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반갑기는 하지만 탐탁하지는 않은 눈치다.
“씨끄소”
“어데 씨끌 때가 있노?”
“다 했다. 내가 비끼줄끼네 시끄소.”
엄마가 한 쪽 발을 살짝 모두면서 대야를 밀어준다. 약주도 적당히 되어 기분이 좋은 아버지는 들고 있던 누런 봉투를 방바닥에 던져두고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방으로 들어와서 동생들 곁에 눕는다. 얼굴에 계속 빙글빙글 미소가 감도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아보인다.
미희야, 봉투 열어 봐라. 아버지가 들고 온 누런 봉투 속에는 동화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책 읽기를 즐기는 것을 참 좋아하는 아버지의 설날 선물이었다. 우리 형제들의 산타인 아버지가 설날에 전해 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