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십원짜리 다섯 개를 넣으니 띠--,하고 긴 기계음을 낸다. 나는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딸깍,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약간 끊기는 듯 어리고 어색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범수다. 눈물을 목으로 꿀꺽 삼키면서 범수야, 엄마, 하니까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엄마야?”
“응, 우리 범수 뭐 먹고 싶어?”
“빵, 엄마, 식빵 사와.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와.”
“그래, 그러자.”
나는 수화기를 놓고 뒤돌아 공중전화 부스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제과점으로 들어간다. 식빵과 우유, 인심 좋은 주인 아저씨가 넣어주는 생크림과 석빙고 아이스크림을 노란 제과점 봉투에 담아서 들고 돈을 치른다. 제과점에서 집까지는 내 느린 걸음으로도 삼분쯤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너무나 멀고 힘겹게 느껴진다.
사채업자와는 얘기가 잘 안 되었다. 그쪽에서 내 세우는 조건은 이쪽에서 받아 들이기가 어렵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쪽에서 곤란해 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날마다 사채를 써서 잘못 된 온갖 사례들이 보도되는 판국이어서 사채 사무실을 나오면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속 생각을 했던 것이지만 막상 며칠 안에 막아내야 할 빚을 생각하면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공장에서 삼년을 채우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그만 두셨다. 그리고는 국밥집 할머니와 계란 할머니의 배려 덕분에 시장 한 쪽에 자리를 얻어 야채 장수를 시작하셨다. 주로 고추, 파, 마늘, 양파 등의 부식이 되는 야채들을 파셨다. 엄마는 장사를 참 잘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무슨 건수로든 늘 싸움을 벌이는 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도대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누구하고나 친했고 누구하고나 다 잘 알았다. 두어달 만에 단골도 많이 만들어 집에서 쓰는 생활비를 충당 할 만큼 벌었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시래기국이었다. 곁에서 배추를 파는 아주머니의 남은 배춧잎들을 나누어 가져와 국을 끓였다. 과일도 드물지 않게 먹었다.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흠이 있거나 멍이 들어서 못 파는 것들을 싼 값에 사와서 흠 있는 부분을 도려내고 먹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남동생 창건이는 우리 집 하나 뿐인 아들이자 엄마의 희망이었다. 아들 답지않게 곰살궂은 면도 많아서 엄마 맘도 잘 헤아렸던 창건이가 과일을 먹다가 엄마를 무안하게 한 일이 있다.
“엄마, 우리 좀 적게 먹더라도 이런 것 말고 좋은 것 좀 사 먹자.”
엄마의 얼굴은 금새 붉으레해져서 평소답지 않게 대답 할 말을 못 찾고 어찌 할 바를 몰라하는데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야 임마, 이런 게 더 맛있는 기다.”
“정말, 아빠?”
아버지의 보물인 막내가 아버지 무릎 앞에 찰싹 달라 붙는다.
“그러엄, 너무 맛이 있으니까 벌레도 묵는기지. 벌레 묵지 않은 거는 겉만 멀쩡하지, 속은 써서 못 씬다 말이다.”
희순이 엄마의 팔다 남은 생선은 집안 사람들이 다 팔아 주었다. 하숙을 해서 늘 청년 서너명에 아가씨 서너명이 있었던 성구네는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고 매 끼니마다 생선을 상에 올리는 계란집 할머니네도 희순이네 단골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기는 귀하지만 저녁상에는 늘 생선 한 마리가 올랐다. 불에 그을려 간장을 찍어 싸먹는 김과 구운 생선이 상에 오르는 가장 귀하고 맛있는 반찬이었다. 창건이는 통째로 구운 생선이 상에 오르면 꼭 생선의 눈알을 먹었다. 그것이 고소하고 맛있다고 했다. 해괴해 보여서 우리 딸들은 참 싫어하였지만 엄마는 눈알이 영양분이 많다고 그것을 좋아하셨다. 비위가 약한 막내는 창건이의 그런 버릇 덕에 지금도 생선을 즐기지 않는다.
방학이 되면 집안은 하루 종일 시끄럽다. 우리 집에 아이가 넷, 희순이와 동생, 병국이와 동생 병학이, 국밥집 할머니 손녀 미현이를 합치면 아이가 자그마치 아홉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외부친구들까지 불러 들인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사상공단을 끼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의 부모는 거의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부모는 대부분 공단의 어느 공장을 다니거나 노가다판에서 일을 했다.
우리 집에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오는 넝마주이가 있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깡통에 보리밥...”같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주워들은 얄궂은 이야기, 동네에 누구와 누구가 어쩐다는 얘기들을 전해 주고는 했다. 우리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주위에 몰려들어 그 얘기들을 듣기도 하고 깡통에 보리밥, 노래를 배워서 부르기도 했다.
고무줄 놀이도 많이 했다. 그 무렵에는 네 명이 편이 되어 각각 기둥이 되고 한 편은 기둥을 따라 건너 가면서 하는 고무줄이 유행이어서 그 놀이를 즐겼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당번을 하고 두개의 고무줄을 엮어 가면서 하는 놀이도 유행의 하나였다. 운동 신경이 좀 둔한 편이라 놀이에 좀 서툴어서 학교에서는 고무줄을 잘 하지 않던 나였지만 집에 와서 희순이나 미현이와는 고무줄 놀이를 많이 했다. 잘 못 해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징어 모양을 시멘트를 바른 마당에 그려놓고 하는 오징어땅이나 표준어로 사방치기라고 한다는 시마차기도 많이 했다. 한참 놀이에 열중해 있을 때 꼭 계란 집 할머니가 뛰어 나온다. 이 너무 새끼들, 시까라바서 어데 살겠나? 다 안 드가나? 그러면서 아이들을 쫓는다. 그런다고 놀이를 포기 할 우리들은 아니어서 우리는 골목 밖으로 나와서 다시 고무줄을 하거나 남자 애들과 함께 딱지치기를 하거나 오원짜리 풀빵을 사먹거나 하면서 놀았다.
나는 만화책을 좋아해서 만화가게에도 자주 갔다. 작가나 제목같은 것은 정확히 기억 할 수가 없지만 귀신붙은 축구공에 얽힌 이야기를 손에 땀을 쥐고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월남전 직후여서 전쟁을 그린 얘기도 많이 있었다.특히, 차성진의 작품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버려진 흑인 혼혈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읽었다. 키워주는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비누를 꺼내어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도록 손을 씻는 어린 소녀의 얘기를 읽으면서 나는 잘 알지도 못 하는 혼혈아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가당찮은 결심도 했었다. 그 무렵의 주인공 가운데 윤승운이 만들어 낸 요철이나 신문수가 만들어 낸 원시소년 똘비, 특히 지금도 내가 좋아해 마지 않는 꺼벙이와 땡이. 한번은 동전을 모아 둔 저금통을 털어 만화가게를 갔다. 그런데 창건이가 그날 저녁 무슨 얘기끝에 만화 어쩌구 하다가 엄마에게 그 사실을 들켰다. 잡히는 것이 무기인 엄마에게서 나는 무엇이 될라고 그러냐고 아주 안 죽을만큼 혼이 났다. 그래도 나는 만화에의 유혹을 끊지 못 했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만화를 좋아하고 더불어 전체이용가 등급의 어린이용 영화도 너무나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