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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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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ggummani 2002-04-21

겉으로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일요일 오후다. 아이들은 낮잠에 들었다. 새벽부터 머릿 속을 떠돌던 얘기들은 아직 다 정리가 되지 못 하고 내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것들은 추억의 파편들이다. 소설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나니 왜 그렇게 많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추억이라는 말은 너무나 상투적이니 그냥 건조하게 기억이라고 하자. 기억되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 그것들은 모두가 잘게 바스라진 유리 조각들 같아서 저마다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심지어는 그 무렵에는 많이 아팠을 기억들도 지금의 아픔이 아니기에 멀리서 요술구슬을 통해 들여다 보듯 영롱하다. 내 영혼의 어딘가에는 그 때에 베인 상처가 아직 남아있다 하여도 지금 그 상처는 버리고 싶지 않은 내 일부분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시인 김승희는 그의 글에서 시의 원형인 "뮤즈"들은 기억의 여신이 낳은 딸들이라고 써 놓았다. 그리하여 시인은 독수리에게 살을 뜯기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제 살을 파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슬프고 아픈 존재라고 썼다. 오십대에 이른 지금 시인의 생각은 좀 긍정적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시인이든 아니든, 우리 모든 인간은 기억이라는 끝없는 양분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 하고 끝없이 뒤를 돌아다 보는 존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해바라기, 고호의 말기작품인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보고 미술 선생은 아이들에게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소감을 물었었다. 중학교 2학년생 아직은 꽃은 우아하고 예쁘다고만 생각 할 나이인 우리들에게 선생은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서너명의 대답이 그렇고 그런 대답으로 일관했을 때 뒷 자리에 앉았던 아이 하나가 자신은 이 해바라기에서 슬픔, 혹은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고 했다. 선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작품이 고호가 자살하기 일년전에 그린 작품이며 학생이 그러한 느낌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아이는 자신은 그냥 느낀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질투에 불탔다. 거짓말이야,,,그애는 어떤 경로이든지 그 작품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중학교 2학년인 아이가 "죽음의 냄새"같은 표현까지 쓸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고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해바라기"를 그다지 좋아할 수 없다. 이유는 또 있다.

봄, 키가 큰 해바라기를 두그루나 심어 둔 화단이라고 이름하기는 어색한 담벼락 아래에 입이 약간 비틀어지게 웃는 내가 볼록렌즈처럼 불편한 자세로 앞에 앉아있고 동생들이 기차놀이하듯 나란히 뒤에 앉아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주인집의 막내아들이 찍어 준 것이다. 이 말고도 그가 찍어준 사진은 더러있다.그의 꿈은 사진작가였다. 이십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 그가 꿈을 이루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해바라기가 배경인 사진을 보다보면 해바라기와 키가 똑 같은 바지랑대가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부활절 아침, 행복한 얼굴로 집에 돌아 온 나를 마당에서 마구 내 패대기친 바지랑대. 열두살이 되던 봄. 사월은 행복하였다. 교회는 유쾌하고 즐거운 곳이었다. 나는 매일 학교를 마친 후에 교회에 가서 부활절 찬양곡을 연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절의 아침, 나는 교회에서 연습한 곡을 친구들과 함께 모든 어른들이 앉아있는 곳에서 불렀다. 예배가 끝나고 예쁜 그림이 그려진 부활절의 계란을 손에 들고 집에 온 나를 보고 엄마는 바지랑대를 쳐 들어 마당에서 정말 개 잡듯이 잡았다. 나는 두 손을 싹싹 모두어 빌면서 다시는 교회에 발도 디디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엄마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정말로 나는 그 뒤로 고등학교에 갈 때 까지 교회에 안 갔다. 그렇지만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은 많이 있었다. 학교에 가서 보면 이상하게도 부모가 교회에 다니는 집 아이들은 다 잘 살았다.의사거나 국회의원이거나 나중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 친구의 엄마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그 무렵을 생각하면 부옇게 아지랑이가 낀 듯하다. 또렷하면서도 좀 불투명한 아름다우면서도 불편한, 뭐 그런 기억들..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그 집을 보석함 제일 안쪽에 은밀하게 감추어 둔 제일 영롱한 유리구슬처럼 기억한다.

그 집에는 모두 일곱가구가 살았다.시장에서 계란 도매상을 크게하여 우리가 늘 "계란 할머니"라고 불렀던 주인집. 그리고 두개의 방 가운데 하나와 다락에서 하숙을 하면서 아이둘을 길렀던 성구네, 그렇게 본채에 두집이 살았다. 그리고 아랫채에는 우리집과 병국이네, 희순이네, 바느질 할머니네, 국밥 할머니네가 살았다. 성구네에는 성구가 아직 어렸고 나와 병국이, 희순이, 그리고 국밥 할머니네 손녀딸 미현이가 모두 동갑네기였다. 어려서부터 그집에 살았던 희순이는 집안 일을 웬만한 어른들 보다 더 잘 했다. 밥이며 반찬은 물론이고 무거운 빨래까지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처음 그 집에 이사 할 때 열 한살이었던 나는 아직 밥을 지을 줄 몰랐다. 희순이가 연탄불에서 밥 짓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고 곤로 다루는 법도 희순이에게 배웠다.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 하던 시절, 어른들은 한 밤중이 되어야 볼 수 있었고 우리들은 어른들이 없는 빈 집을 그렇게 지켰다. 우리끼리 밥 해서 먹고 병국이네만 있던 텔레비젼의 수사반장도 같이 보고 깜깜해서 금도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오징어땅을 하면서..

희순이 엄마는 생선 장수를 했다. 희순이네 집에 가면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도 늘 생선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이 참 싫었는데 친구가 많지 않은 데다가 희순이가 너무 착하고 좋은 친구여서 싫은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기숙사를 제공받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다. 나이차가 많은 오빠였다. 가끔 한 번씩 와서 대개는 잠도 자지 않고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희순이 밑으로 정순이라는 두살 아래 동생이 있었으니, 남편이 없는 희순이의 엄마는 아들만 의지하고 살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희순이는 중학교를 못 갔다. 희순이가 중학교에 갈 무렵에는 오빠는 학교를 마치고 군인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오빠도 고등학교를 스스로 벌어서 다녔는데 딸인 희순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착하고 부지런한 희순이는 또래들이 중학교에 가는 것 보다 훨씬 빨리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고 사회인 답게 아직 국민학생인 동생의 뒤를 봐주고는 공장으로 갔다. 열심히 공장을 다니면서 미싱을 익힌 희순이. 처녀가 된 뒤의 희순이를 나는 모르지만 아마도 열심히 기술 익히고 부지런히 돈도 벌어서 지금은 옛날 얘기하면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처럼 착하고 부지런하고 살림솜씨 딱 부러진 야무진 희순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