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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난바보다누구보다 2002-03-01

#1 우울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하다.

*********서정윤




목요일 퇴근길이었다.
아침에 오늘은 맛있는 저녁을 해 먹자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집 근처의 대형 할인 매장에 갔다.
입구의 노오란 바구니를 들고 매장 내를 한 바퀴 주욱 돌았다.
무얼 사야지, 무엇을 만들어 먹어야지, 무엇이 먹고 싶어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아무거나 이것저것 샀다.
당근의 주황색이 예뻐서 언니가 당근을 싫어한다는 것도 잊고 두 묶음이나 샀다.
오늘 들어온 것인 듯 채소가 싱싱해 보여 푸른 냄새가 나는 미나리를 샀다.
피부에 좋은 한방 쑥 비누, 라고 적혀있길래 언니 거와 내 거 두 개를 샀다.
성장기에 좋은 칼슘치즈를 열 장 샀고, 목욕하기 좋아하는 지원이를 생각하며 바디로션을 하나 샀다.
한 꼬마아이가 쵸코파이를 먹고 있길래 쵸코파이를 한 통 샀고, 딸기가 먹음직스러워서 포장되어 있는 걸 두 개나 샀다.
시식코너에서 마신 유자차가 맛있어서 유자차를 샀고, 대추차를 권하길래 그것두 샀다.
전혀 쓸거리가 없는 남성용 스킨 로션을 샀고, 향수 냄새를 싫어하면서도 병 모양이 세련된 어떤 냄새인지도 모르는 향수를 샀다.
적어도 삼년은 더 있어야 지원이가 입을 수 있을 뽀빠이 바지를 샀다.
그렇게 있는 돈만큼 다 샀다.
아무거나. 이것저것.
무거운 짐을 들고 집으로 가며 주머니를 뒤지니 380원이 나왔다.
나는 근처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먹었다. 그래도 80원이 남았다. 자판기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동전 여덟개를 모조리 넣었다. 어디 전화하지...
딱히 떠오르는 데가 없었다, 집밖에는.
여보세요, 수화기에 입을 꽉 대고 지원이가 말했다.
어, 엄마야. 내가 말했고 엄마? 반갑게 지원이 말했다.
왜 안와? 빨리 와아~ 지원이 말했고 나는 지금 들어간다고 했다.
남은 금액에 30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엄마 빠빠이. 지원의 끝인사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딸깍. 딸깍. 딸깍.
공중전화가 동전을 삼키는 소리를 끝까지 듣고 부스를 나왔다.
이제 남김없이 다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딸랑, 동전 하나가 구른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떼르르 굴러 내 앞에 멈춘다.
나는 동전을 집어 길 옆의 하수구멍으로 던진다.
쏙, 들어가면서 은빛이 난다. 백원짜리였던 모양이다.


엄마ㅡ, 지원이 문 밖으로 달려나오며 나를 반긴다.
언니가 짐을 받는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하면서.
우리 지원이 오늘 유치원에서 뭐 배웠어?
나는 지원을 번쩍 들어안으며 묻는다.
지원이 뭐라고 말하는데 귀에 들어오진 않는다.
거실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언니, 오늘 무슨 날이야? 오늘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두어번 그려져 있다.
아니, 왜? 주방에서 물건을 꺼내던 언니가 되묻는다.
나는 지원을 내려놓고 언니에게 다가간다.
넌 무슨 물건을 이렇게 많이 샀니? 다 들고 온게 용하다.
가벼운 언니의 몸짓이 과장되어 있다.
나는 모른 척 한다.
근데 무슨 요리를 해먹을 수가 없네. 재료가 따로 논다, 얘.
언니가 내 어깨를 툭 친다.
문득 다정한 자매같다, 우리가.
나는 무슨 날이냐고 한 번 더 물으려다가 입을 다문다.
생각이 나서였다.
퇴근길에 그토록 우울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와, 쵸꼬빠이다! 지원이 달려와 쵸코파이 상자를 집어든다.
언니와 나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함께 요리를 한다.




오. 늘. 은. 그의 생일이었다.
지원의 아빠.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언니의 남편이었던.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
아니 우리가 사랑했던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