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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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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BY 마음 2002-06-29

아침부터 날씨가 영 심상찮았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가 싶더니 꽃샘추위로 영하권이 어쩌구 하는 일기예보 소리가 엄마를 당황스럽게 하는 모양이었다.
“큰일났네... 뭘 입고 가야 되나.. 코트를 입고 갈 수도 없고..."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현화를 깨워서 어떤 옷이 나을지 부산을 떨고 있었다.
한복을 입고 가자고 하기에도 너무 거추장스럽고 코트를 입자니 도무지 몇 년이나 된 건지 알수 없을만큼 낡아서 차마 그걸 입고 가자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옷장을 열어놓고 옷이란 옷은 죄다 내어 놓았다.
옷들이 하나 같이 넝마중이 같다.
대부분이 니트 종류였는데 어느 것 하나 반듯한 게 없었다.
현화가 기어이 한마디를 한다.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런 사구려만 입어?”
“다들 좀 그렇지?”
어쩔 줄 모르는 엄마의 얼굴 한켠에 약간의 서운함이 비친다.
“이런 옷들은 다 어디서 사? 길에 늘여 놓고 파는 옷도 이것보다 낫겠네....”
나는 반강제로 현화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뭐하는 거야?”
“언니! 왜?”
“아무리 너라도 그렇지... 엄마 얼굴 봐 가면서 말을 해도 좀 해. 생각이 없이 그러지 좀 말고....”
“내가 좀 심했나?”
“그래.... 알았으면 들어가 봐!”
동생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오분도 채 안되어 이번엔 엄마가 얼굴 가득 노기를 띤체 나왔다.
“왜 그래, 엄마!”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뒤이어 수돗물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더니 벌건 눈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나왔다.
엄마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엄마에겐 버릴 수 없는 엄마만의 자리가 있는 것 같아서..... 그 벽을 허무는 일은 아무래도 아직은 이른 듯 했다.
엄마의 머리를 만져 주는 일은 예전부터 내가 해오던 일이다.
갈색으로 염색한 굵은 머리카락의 웨이브는 아직은 드라이 하나로도 충분히 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아직 엄마는 젊었다.
스킨을 바르고 로션에다 메이컵 베이스로 기초화장을 한 후 환한색으로 메이컵을 마쳤다.
정성을 다해 엄마는 당신의 얼굴을 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우리 엄마, 지금 시집보내도 괜찮겠어. 아직도 꽃띤데?”
젖은 머리를 말리고 젤을 살짝 바른 후 굵은 웨이브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졸업식은 강당에서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고 싱겁게 끝이 났다.
강당을 막 빠져나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살며시 옷깃을 잡아당긴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어서 그가 이끄는 데로 한 옆으로 피하려다 그의 팔을 내가 오히려 잡고 섰다.
현화하고 함께 오겠다던 엄마가 보기라도 할까봐 그를 다시 떼어놓으며 고개를 빼내어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지난번 현화 결혼식 때 입고 갔던 한복을 입은 엄마가 현화와 함께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나란히 서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준우도 금새 알아차리고 꾸벅 인사를 한다.
나쁜짓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억지로 가다듬으면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동안 엄마는 내 눈치를 계속 보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현화는 나보다도 더 준우 때문에 기분이 들썽거리는 듯 했다.
시종 히죽거리며 준우오빠 준우오빠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현화를 보면서 저 아이에게 준우 같은 형부를 만들어 주는 것만큼 더 큰 선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준우와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고 섰는데 엄마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나는 잠시 내가 쓰고 있는 것이 학사모가 아니라 면사포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이게 꿈이라면 이런 단꿈을 계속해서 꾸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이내 날 흔들어 깨웠다.
“친구들 하고 다 같이 점심이라도 하려 가자. 준우도 같이...”
엄마는 내 졸업식에 와준 고등학교 때 친구 미진이와 혜은이를 의식을 해서인지 그 표정이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이거 세 팀으로 쪼개져야 하는건지 참 그러네...”
현화의 말버릇은 여기까지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눈으로 주의를 주려는데 엄마가 먼저 양보를 한다.
“내가 있으면 아무래도 불편하지? 현희 니가 다들 데리고 가서 점심 대접해라. 현화도 가고 싶으면 언니 따라 나서던지.....”
“그러면 엄마! 우리는 우리끼리 가서 맛있는 거 먹자. ”
현화의 그 말 한마디에 아이의 등을 잠깐 토닥거렸다.
이 아이 밖에 없구나 하는 내 마음이었다.
엄마는 한복 두루마기와 같은 천으로 만든 핸드백 속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미리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듬성 집어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괜찮은 걸로 대접해라.”
“뭘 이렇게 많이 줘?”
“이럴 때는 쓰는거야. 알았니?”엄마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나는 그 미소 뒤에 엄마의 마음을 함께 읽어 버린 것 같아서 오히려 그 돈을 쓰지 못할 것만 같다.
엄마를 동생한테 맡기고 친구들 하고 시내로 들어오면서 내내 그들 뒷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
아주 가까운 시간에 나는 엄마를 현화에게 맡기고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런일조차도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처럼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슴 언저리가 저려오는데....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불편할 걸 뻔히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따라와 주는 준우의 얼굴을 잠시 훔쳐보았다.
버스 속에서의 그의 표정은 완전히 어린아이 표정이다.
그늘하나 없는 천진함 그대로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