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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BY 마음 2002-06-08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거의 반동적으로 터져나온 엄마라는 외침이 안방을 빠져나오는데도 여전히 귓전에 머무르는 듯 했다.
“어디갔다 오는거야?”
여전히 무뚝뚝함이 그대로 베어 있는 내 말투는 내가 생각해도 생긴 것 하고는 딴판이었다.
“걱정했니? 어디 좀 다녀올 때가 있어서....”
“어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다녀올 때가 있어서.....”
“참! 나 국시 합격했대....”
커피물을 올리려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한 말이긴 하지만 엄마의 환호성은 영락없는 아이 같았다.
손뼉을 치고 풀쩍풀쩍 뛰기까지 했다.
“정말이니? 정말이야? 아이구 하나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나님이라니? 언제 엄마가 교회를 다녔다고.....아참, 옛날 덕산에 살 때 좀 나갔다고 했지......”
“내 기도 덕분이야. 내가 기도 많이 했거든....”
“지금도 하나님을 찾어?”
“너는 기억을 잘 못하나 본데 내가 덕산 교회 나오면서 교회 나가는 일을 접어버리긴 했다만 집사직분까지 받은 몸이야. 아직도 마음속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봐야지...”
엄마의 껍데기가 하나씩 벗겨져서 수북히 쌓여지던 때가 있었다. 그 때가 불과 서너달 전 일인데 그 사이에 엄마의 매일같이 치루던 의식은 세수 정도 하는 걸로 변해 있었다.
그 변화에 대해서 물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이제는 말해 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엄마를 위해 손님접대용으로 사다둔 인삼차 한잔을 만들어 엄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영양크림을 바른 탓인지 유난스럽게 더 번들거리는 엄마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일어나 보인다.
“엄마, 술 마셨어?”
“얘는? 내가 술꾼이냐? 매일 같이 마시게.....”
엄마가 술 마셨다고 얼굴이 달아 오르는 일은 없는데...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왜 그렇긴.... 나이 탓이지.... 이게 폐경기에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거 모르니?”
“갱년기 증상?”
“그래..... 이젠 여자라는 말이 오히려 부끄러운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네....”
늘 깔려져 있던 작은 요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본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비집고 들어가 누워버렸다. 잠깐 그러고 싶어서, 그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이 엄마 눈엔 그 모습이 안되어 보였던지 내 머리를 들어 베개를 밀어 넣어 주고는 이불 하나를 더 꺼집어 낸다. 그리고는 내 얼굴에 묻어있던 머리칼들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더니 손으로 빗처럼 내 긴 생머리를 빗질했다.
“내 자식이지만 너를 보고 있으면 날 보는 것 같아서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어?”
“그래..... 딸은 아빠를 닮아야 잘 산다고 하던데.......”
아빠라는 말에 엄마도 무심해지려 노력하고 있었겠지만 늘 우리 사이엔 이러한 말들이 오갈 때 마다 자유스럽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 엄마는 지금껏 내가 느껴 보지 못한 강한 모성애를 내게 고스란히 퍼 넣어 주려는 듯 그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엄마!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주기 곤란하면 안해줘도 상관은 없어..”
“뭐냐? 들어보고....”
“왜 요사인 옛날처럼 그렇게 샤워하지 않어?”
“샤워? 흐흐흐 그 얘기는 너 붙들고 다 얘기하자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할거다. ”
“더 궁금하잖아.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었지만.....”
“글쎄다. 그 얘기는 니가 내 곁을 떠날 쯤에 선물로 대신해서 말해 주고 싶은데....”
“엄마한테 그런 심오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거라고는 그렇게까지 심각한거야?”
“심각한 것은 아니고 아무튼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졸업시즌이 시작되면서 취업 얘기도 함께 시작되었다.
엄마는 큰엄마한테 전화해서 큰아버지 아시는 분 중에 병원에 계시는 분 없냐고 물어보시기도 하고 심지어 준우까지 주변에 아는 사람들 찾아 나서기에 정신들이 없을 때, 학교에서 학과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내안에 있는 준종합병원 병리실, 준종합이라고 하지만 시외에 있는 종합병원 못지않은 규모이다.
그런데다가 집에서 출퇴근하기 좋고 어느 무엇 하나 걸리는 것이 없는 과분한 자리인데 나는 선뜻 대답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취업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내 머릿속에는 줄곤 한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지금이 어쩌면 가장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준우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있는 좋은 기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와 그렇게 헤어져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교수님! 신경 써 주신 것 너무 고마운데 저..... 여기 K시 안에 있는 것 말고 서울 쪽이나 아니면 완전히 타지에 있는 그런 병원은 혹시 접수 된 것은 없나요?”
“왜? 첫 직장인데 이 기회를 놓칠려고...?”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요..... 여기 아니면 어디든지 상관은 없어요...”
실망스러워 하는 학과장의 목소리가 전화선 저 너머에서 끊어지려는데 마음 한 구석엔 심한 방망이질을 벌써부터 해대고 있었다.
그와의 이별을 그저 막연하게 생각만 해오던 것이 이젠 확실한 결말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누구 한테고 흘려 본적이 없던 그와의 이별계획은 철저히 나 혼자만의 시나리오일테지만 결국엔 그렇게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남의 일이 아닌 완전히 나 혼자만이 이겨내야만 하는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가슴을 쓸어 내려 보았다.
진정을 시킨 상태에서 심호흡을 시켜본다.
처음 떨어져 살게 될 부모 형제가 걱정이 아니라 준우와의 결별이 먼저 슬픔을 몰고 시작했다. 한꺼번에 몰아쳐 오르는 깊은 슬픔,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부터 목젖에 메달려 있는 토해내지 못하는 슬픔이 날 휘청거리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