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호프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으면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통나무로 만든 내부 구조다. 통나무가 호프집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참으로 잘 맞다는 생각을 했다.
안주를 고르기 위해 메뉴판을 훑어 보면서 '고를 것도 없지 뭐,' 하고 덮어 버리던 내가 피식 웃어버린다.
앞에 앉은 사람을 순간 준우로 착각을 한 것이다.
다시 찬찬히 훑어 본다.
화이트 소세지.....5000원, 이거 어떠냐고 물어본다.
내가 사는 것이니까 내가 당연히 주문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무장의 눈치를 봐가며 피쳐로 할까요. 어떻할까요? 또 그의 의양을 들어본다.
맥주가 먼저 나왔다.
“오늘 왜 기분이 그래요? 시험 망쳤어요?”
사무장은 아마 진작부터 이런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요....... 저..... 시험 자신없어요........”
“설마....... 괜히...... 그러는거 아니예요? ”
“처음부터 무리였어요.... 직장을 그만 두던지...... 했었어야 했었는데.... 제가 미련을 떨었어요....”
“아직 발표난 것도 아닌데.... 뭘 벌써부터 그래요....”
“.........”
할 말이 없어져 버린건지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아마 술기운 탓일 것이다.
“한현희씨! 자, 기운내고.... ”벌써 몇 번째 내 잔에다 요란하리만치 자신의 잔으로 부라보, 건배를 외쳐대고 있는지 모른다.
사무장은 내가 신경이 꽤나 쓰이는 모양이었다.
“사무장님!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지금도 부인 사랑하세요?”“허허허...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장님까지 그렇게 말 하면 안 되죠. 대학도 안 마치고 결혼했다고 해 놓고선.... ”
“그때는 그랬지..... 같은 이불 덮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그런 바램으로 연애를 했는지도 모르지....... 그땐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 했으니까...... 그러다 덜컥 애가 생기고......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막막하도군. 그렇지만 차마 내 입으로 애를 지우자는 소리는 못했어요. 아이엄마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고..... 우리는 그러면서 눈치만 보다가 더 배 부르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고..... 흠..... 우습죠.....? 내가 이런 얘기하기는 뭣한데..... 그때 아이가 우리에게 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아마 사회로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다른 연인들처럼 그랬다면 결혼까지 왔을까 싶어요,,,,”
“부인하고는 언제 만났어요?”
“군에 갔다오고 복학할 때였는데 아직도 솜털도 안 벗겨진 아이처럼 귀여웠어요... 말하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하얀치아며 투명한 피부가 내겐 눈부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 그런데 참으로 우스운게 뭐가 통한 건지 서로 필이란게 생긴거에요..... 나를 보는 눈빛이 내가 느낄 정도로 남달랐다는 거 아닙니까..... 흣..... 그걸 보통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지나고 보니까 지금은 이해가 잘 안되죠. 내 감정 조차도 이해가 잘 안되는데.....”
“하지만 전 그러한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퇴색이 될 터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절실하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해본 소리였다.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니까 준우가 너무 보고 싶어진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핸드폰을 안 가져 갔다고 해도 이젠 받을 만도 한데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 플랩을 열었다.
이젠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신호도 가기 전에 기계음부터 나온다.
전화를 꺼 놓은 모양이다.
음성을 다시 남길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무장은 피쳐 하나를 더 시킬까 어쩔까 하고 있었다.
사실은 이 정도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았지만 분위기상 그를 만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다시 피쳐 하나를 더 추가시키더니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한 현 희씨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거 좀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 애인이라고 한다면 함께 있어줘야지... 안 그래요? 얼굴보면 안 그렇게 생겼는데 사람이 좀 무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애...... 미안....... 술 취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사랑.... 그거 너무 믿지 마.....요.... 지난번에 그 애인인지 뭔지.... 그 사람 어머니 다녀가고 난 뒤에 미스한 힘들어 하는 거 ....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것도 다 그 사람이 못나서 그런거지..... 요사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해요.... 안 그래요...?” 그의 말은 느리고 꼬여들어 띄염띄염 나왔지만 그는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을 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준우에 대한 얘기는 불쾌했지만 그래도 사무장이라는 사람을 내가 믿는 마음이 그것들을 자제시킬 수 있었다.
“내가 오빠 같은 마음이어서 그런데...... 상처 받을 일이라면 일치감치 그만 둬요....”
“제 말은 이제 그만 해요.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듣기는 영 거북하네요....”
“오, 미안....... 내가 오빠 같은 마음이어서....... 한 현 희씨 내가 좋아하는거 알지요? 누구든지 우리 미스한 힘들게 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꺼야.....” 그의 말들이 공중에서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간 다시 뭉쳐지는 것만 같았다.
“사무장님 주량이 이 정도에요..... 벌써 취했어요......”
“내가 좋아한다는 말 때문에 그래요? 흣훗...... 이렇게 순진하긴,,,,,, 내가 뭐 이성으로 미스한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지.......”
그의 말처럼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를 신뢰하는 마음이 컸었다.
하지만 그가 준우를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만큼은 그저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거다.
한데 이런 상황에 준우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그가 보고 싶어지는 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느다란 파장이 온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술기운하고는 분명 다른 것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이것은 그가 처음 내 목덜미를 더듬을 때 느꼈던 기분하고도 비슷하고 내 심장을 조여드는 또 다른 답답함이었다.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찾아내어 본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이렇게 대책 없이 늘어지는 그를 두고 나올 수도 없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중인데 사무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던 그 사람은 계산대로 가서 술값을 치르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안 갈꺼냐고 소릴 지르고 있었다.
초등학생 학부형이라는 이 남자는 오히려 준우보다도 더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90도 각도로 옆으로 꺾고 서 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괜스레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오랫동안 천천히 뿜어져 나온다.
집으로 가야 할 터인데 가기가 싫다. 시험 끝나고 엄마하고 통화를 했지만 엄마한테 보다 다시 준우한테 또 전화를 넣어본다.
벌써 몇 번째인가....... 신호가 가고 한참을 기다려 본다. 누군가 여보세요 하는데 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의 어머니일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냈다.
어떻게 할까 잠깐 망설이다 이내 예의를 갖추어 나를 밝혔다.
“아..... 현희구나..... 오늘 너 시험 있다는 소릴 준우한테서 들었다. 그래, 시험은 잘 봤니?”
지난번 우리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만난 후 이렇게 대화를 해 본적은 처음인 것 같다.
“아직....모르겠어요... 그런데 준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무 일도 없다..... 그건 그렇고 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
여전히 착 가라앉은 목소리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준우가 원체 마음이 약해나서 그런가 본데 니가 알아서 좀 굴지...... 내가 알아 듣도록 너한테 다 얘기를 했었잖아.....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지난번 너희 엄마 우리집에 일하려 오셔서 그러시더라..... 너 야무지다고..... 그리고 요사이 너만한 애 없다고.... 현희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니가 이러면 이럴수록 너 엄마 가슴에 못 박는 일 밖에 안 된다는 거 알아둬라... 알겠니? 그리고 우리집에 놀려 한번 와라..... 너희 엄마도 자주 놀려 오신다고 했다. 이웃에 사는 줄도 모르고..... 알겠니? ”
“네....그럼 안녕히 계세요....”
준우엄마 앞에서는 늘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