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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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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BY 마음 2002-02-09

국가고시를 치르기 위해 학교에서 단체 관광버스까지 대절시켜서 서울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친척집이나 아는 이들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나처럼 전혀 갈 곳이라곤 없는 학생들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시험장소 근처에다 숙소를 잡아 주었는데 학교 측에서 매년 해 오던 행사였다. 밤엔 컵라면이 간식으로 나오고 따끈한 커피를 만들어 돌리는 학교 총학생회 후배들도 찾아온다.
늦은 시간까지 가지고 온 문제집으로 마무리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마음은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지난해 합격률이 65%라고 했는데 나처럼 공부해서 붙을 것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마디로 자신이 없었다.
어제는 준우가 그래도 시험인데 얼굴 좀 보자며 전화가 왔었는데도 갔다 와서 보던지 하자며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준우도 내 시험을 의식해서인지 마음 편하게 먹고 시험 잘 치루고 오라고 하고는 더 이상 다른 말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2차 실기까지 끝나는 시간이 12시 반이다. 시험은 걱정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2차 실기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시험을 다 치루고 나오는데 마음은 이미 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준우의 얼굴이 엄마보다도 먼저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 데리려 와 준 그의 정성을 이처럼 무시를 해 버려도 되는 것인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눈을 감고 좀 자보려고 해도 준우의 얼굴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잠속에 빠져 들지를 못한다.
버스가 중간 금강휴게소에서 잠깐 쉬는 동안 준우한테 전화를 넣어본다.
그의 음성 대신에 그의 부재를 알리는 기계음이 음성메세지를 남기라고 말한다.
직접 그의 음성을 들을 자신이 없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나 현희야, 시험보고 지금 내려 가는 중인데 6시에 녹턴에서 좀 봤으면 싶어서.... 혹시 다른 사정이 있다면 연락 줘....-
그에게 내 말은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 같이 메말라 있다.
잠을 설친 덕에 눈꺼풀은 무겁고 속은 더욱 쓰라리게 아리워온다.
아무생각 없이 잠깐이라도 눈을 부쳐야지 하면서도 마음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날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역 근처에 있는 녹턴은 고전음악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이다.
고풍스런 분위기가 중세를 닮아서 무겁고 안정되어 있어서 우리처럼 젊은 세대들 보단 오히려 삼사십대가 더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곳으로 그를 부른 것은 내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그런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좀 한가진 구석자리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약속시간보다 좀 이른 시간이다.
곧바로 가져다 놓은 물이 얼추 비워져 갈 때 까지도 준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삼십분이 지나갈 쯤에서야 그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예감은 직감으로 사십여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그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본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는데 늘 있어야 할 곳에 그가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싸하게 만든다.
그건 분명 외로움이었다.
그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 내가 느낄 외로움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처럼 준우의 부재가 이렇게 쓸쓸해지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돈다.
누구든지 단 한사람만 지금 내 옆자리를 메워주었으면.......
여자든 남자든 누구하고든 오늘은 술을 좀 마시고 싶다.
내 핸드폰에 기록된 전화번호를 뒤져본다. 고등학교 동창이던 미진이한테 우선 먼저 연락을 해 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는데 그렇게 힘들어 하더니 한글나라 가정방문 선생님을 하는 아이였다.
늦은 시간까지도 부모들의 편리한 시간대에 맞추다 보니 제 시간이라는 게 없어서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주말이 아니면 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누군가를 찾는다. 수신호음이 가고 다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순간 그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끊으려 하는데 저쪽 너머에서 큰소리로 웃는다. 그리곤 내 이름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재촉해서 나야 소리를 몇 번이나 연거푸 내 놓았다.
“목소리가 왜 그러니?”
“그럴일이 좀 있어. 이리로 올래.”
“아니, 나 술 마시고 싶어서....”
“기집애, 니가 왠일이냐.....”친구의 목소리는 여전히 어색하다.
“그런 소리 그만 하고 나올거니? 안 나올거니?”
“나 지금 못나가, ”“집이야?”
“우리집은 아니고...... 우리 이모집.....우리 막내 이모가 이모부 출장가고 없다며 여기 와서 자고 가라고 해서......” 막내이모가 결혼한지 이태 정도 밖에 안 지났던 것 같다.
맏딸이면서도 친구에게는 언니 같은 이모가 있었다. 나이차이가 겨우 두 살 차이만 났었는데 이모부라는 말이 영 어색한지 형부라고 자꾸 부르라고 한다나.....
“그러니? 그런데 목소리는 또 왜 그래....?”
“나 지금 맛사지 받고 있어... 이모가 천연팩인지 뭔지를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붙여 주네.... 야, 안되겠다. 내가 다시 전화할께.....”
마지막으로 준우한테 다시 전화를 넣어 보았다.
여전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음성을 남기란다.
불안한 마음이 다시 스물거리며 일어났다.
준우네 집으로 전화를 걸 수도 없고 마음은 분명 걱정이 되면서도 준우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떨쳐내질 못한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인파들 속에 끼어서 걷고 있었다.
기차역을 한가운데 두고 뻗어나간 차없는 거리, 동성로를 한참이나 걷다 보면 한일극장이 나오고 다시 학원들이 밀집해 있는 학원가까지의 긴 거리는 평일이든 휴일이든 상관없이 붐비는 곳이다. 한일극장을 보는 순간 사무실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과 500미터 거리에 있는 변호사사무실이 있는 대성빌딩 아래까지 와 버린다.
빌딩 밑에서 올려다본 사무실은 역시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6층 603호 오피스텔 같은 사무실이다.
공인회계사부터 해서 개인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이 곳을 다닌 지가 올해가 꼭 만 6년째를 맞고 있다.
저녁식사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고 어쩔까 하다가 근처에 보이는 군밤 삼천원어치를 사들고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엔 사무장 혼자서 내일 아침에 발송할 우편물이라며 일일이 수취인 주소를 적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이는 아직 삼십대 초반인데 애가 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미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는 그 얘기를 할 때에는 쑥스러워 하기 까지 했었다.
법무사 시험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완전히 이쪽 일로 자리를 굳힐 모양이다.
“아직도 퇴근을 안 하셨어요?”
나도 모르게 반가움이 잔뜩 베어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늘 같은 날 ..... 늘 붙어 다니던 바퀴벌레 한 마리는 어디다 두고 혼자야..... 그래, 시험은 잘 봤어요?” 사무장은 늘 그랬듯이 계면쩍어 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게 되었어요... 일이 아직 밀렸나 봐요. 그 일은 제가 내일 아침에 하면 되는데....”
“나도 어쩌다 보니까.....그런데 들고 있는 거, 나 줄려고 가지고 온 거 아니예요?”
“앗참! 군밤이예요..... 저녁은 드셨죠?”
“왜 안 먹었으면 한현희씨가 사 줄 거예요?”
“......... 그럴수도 있죠...”
“?킬.....우리 오늘 뭔 일 내겠구만...... 우리 마누라도 애들 방학이고 해서 친정에 가고 없는데.....히히.....” 그렇게 말하는 남자가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때요...?”
“오늘 정말 이상하네..... 그렇다면 밥은 그만 두고 생맥주나 한잔 하지...?”
“그럴...까요...” 빈 속이나 마찬가진데.... 하지만 그러자고 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