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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동물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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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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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BY 마음 2002-01-29

큰엄마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커피 두잔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오셨다.“현희야. 우선 진정해라....” 내 앞으로 밀쳐 놓은 커피잔은 내 마음을 더욱 긴장시키기 위해 준비한 서막처럼 보인다.
“진정하고 지금부터 하는 내 말......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희 니가 지금부터 어떻게 하는냐에 따라서 너의 엄마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심각한 상황을 만들수도 있다는 걸 알아 두어야 한다............네 엄마, 너도 조금은 알고 있겠지만 다른 여느 엄마들 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한을 가지신 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젠 그런 것들로 조금 벗어났나 싶은데 다시 니가 그것들을 들추어 낸다면 내가 네 엄마라면 아마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게다........ 네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궁금하겠지만 알면 뭐 하냐? 네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굳이 네가 딸이라고 해서 다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안 그러니? 옛날엔 지금하고 또 달라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만 없었던 시대였다. 네 엄마, 네가 생각하는 부끄러운 엄마는 분명히 아니니까 내 말, 듣고 네 엄마를 끝까지 믿어줘라.......... 누가 그런 일을 하겠냐? 너희 아니었으면 그사람, 벌써 이세상 사람 아니었을 거다. ”
말을 잠깐 끊었다. 그리고 내 손을 끌어다가 그 옛날 눈물을 훔쳐가며 말하던 그 때처럼 보듬는다.
“할머니, 너희 엄마한테 정말 못할 짓 많이 하셨단다. 가신 분 욕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쯤은 당신도 아마 후회하고 계실거다. 그 어른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찼을거다. 너희 아버지한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셨는데...... 그런 네 아버지가 완전히 폐인이 되어 나타났을 때, 사실은 나 조차 네 엄마가 밉더라...... 어떻게 저렇게까지 되도록 내 버려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할머닌 너희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단다..............너희들 중에 하나라도 네 아버지를 닮았다면 좀 덜 했을려나.... 둘 다 네 엄마를 꼭 빼 닮아서 아마 더 그랬을거다.... 거기다 네 아버지가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고 나니까 더 모질게 니 엄마를 괴롭혔었어. 그게 어디 네 엄마 잘못이더냐....... 억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런 억지를 돌아가시는 날 까지 하시는데......... 식당에 나가는 일도 있는대로 트집을 잡았다가.... 입에 담지도 못하는 욕을 해대고 그렇게 하셨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된다만 그 당시에는 도무지 네 엄마가 왜 이곳을 못 떠나는지 이해가 안 되더구나...... 덕산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거다. 이 먼 곳까지도 그 이야기가 다 전해올 판이었으니까..... 거기다 네 엄마, 지금은 그렇지만 그 당시만해도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혼자 사는 여자인데다가 얼굴 반반하지....어이구.... 그러니 어디를 가도 결혼한 사람이든 안한 총각이든 죄다 기웃거리는 걸..... 어느날인가는 할머니가 네 엄마 거시기에 나 있던 털을 죄다 뽑아놓았다고 하더라...... 오죽하면 내가 제발 떠나라고 까지 했을라고..... 그러면 뭐하냐 네 아버지 기일에는 또 어김없이 고기근이라도 사들고 찾아와서는 문밖에서라도 그 시간 꼭 넘기고서야 가던 사람이었는걸.... 어찌보면 네 엄마 고집도 웬간했다 싶구나. 나도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너희들이 어려서 그랬다더구나. 그늘이 무섭다고..... 그래도 아버지 그늘은 여기 있다고 믿었던거지......후후....................” 참으로 길고 긴 한숨이었다.
“네가 알고 싶은게 이런 얘기들인냐? 현희야........ 네가 좋아한다는 그 준우라는 사람 말이다......... 내가 봐서는 니 짝이 아니야........ 사람의 인연이란거.....억지로 묶는다거 묶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떼 놓는다고 떼어지는 것도 또한 아니지......
니 엄마를 이렇게 그 집 식구들과 얼키어 놓는다는 것만 봐도 순리가 아니라고 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 준우엄마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니 말만으로도 조금은 알만한 사람같다. 그런 집에 니 시집가서 마음 졸이며 사는 거 너거 엄마 하나로 끝내지 니조차 그럴거야? 어쩌면 그쪽 집 보다 훨씬 좋은 곳에 갈수도 있는 것을 왜 사서 고생이니?”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쉽게 정리가 된대요....? 준우 그 사람한테 저 그러지 못해요......’ 식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물었다. 내어 놓지 못하는 말과 진한 커피 냄새가 뒤 섞여 내 속을 휘휘 저어놓고 있었다.

돌아오는 시내버스안에서 시야가 흐린한 것이 머리가 무겁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아 몇 번식이나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가 창문을 잠깐 열었다가 했다. 도무지 어느 것 하나도 현실감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느 것 한가지도....
입술은 다 말라서 터덜터덜해지고 물체는 여전히 두개씩 겹쳐졌다 펴졌다 한다.
그런 정신 중에서도 엄마에 대한 큰엄마의 이야기들이 전혀 새로운 사실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특별할 것도 없는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으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고 할머니의 만행 -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 은 그 정도 차이여서이지 몰랐던 사실 역시 아니지 않은가....
준우 엄마가 이러한 일들 하나로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그건 분명한 핑계일 뿐이라는게 내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준우와의 시작은 이러한 고난 정도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데도 나는 지금 내 상한 자존심 때문인지 준우도 그의 엄마도 모두 적으로만 보인다.
내속에 내가 알지 못했던 이런 독한 마음이 끝도 없이 고개를 쳐 들기 시작했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시험 얼마 안 남았지?”
주방에서 나는 소리가 현화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엄마 목소리다.
“엄마가 지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반가움과 원망이 함께 섞여서 말속에 이미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엄마말에나 대답하고 다시 묻던지......”
“응! 그렇지 뭐...... ”
“왜 내가 집에 있느니까 싫어니?”
“무슨 소리?”
“니 표정이 지금 그렇잖아....”
“아니 됐어..... 왠일인가 싶어서지 뭐!”
“그런데 오늘 도서관 갔던거 아니야.....?”
“아니.....친구 좀 만나고 왔어....그런데 엄마는 지금 뭐해?”
“뭐하냐니? 저녁 하지...”
“저녁? ”
다른 집에 잘못 들어온 기분이다.
이 시간에 엄마가 우리를 위해서 저녁을 지어 준 게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없다.
그렇게 갑작스런 변화에 넋을 놓고 있는데 이번엔 그런 나를 또 한번 자극을 준다.
“나 이제 식당일 그만 두기로 했다....”
“정말? 잘했어..............”
하지만 내 말 끝이 힘이 없다.
“그 대신에 파트타임이라고, 낮에 잠깐씩만 일하기로 했어..”
“식당에서....”
“아니.....”
“그럼, 엄마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다고 파트타임이야...”
“말버릇 좀 봐라.....”
“아니..... 그렇잖아....”
“시집 갈 때가 되어서 그런가..... 요사이 널 보고 있으면 통통 뛰는 공을 보는 것 같애..”
“무슨 말이야...?” 피식 웃어 버린다.
“말 그대로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튕겨져 나가는....”
식탁에 차려진 저녁상은 기대이상이었다.
“시장 다시 봐 온거야?”
“그래..... 내가 너무 무심했지.....이젠 너희들 그렇게 안 키울거다....”
“엄마는? 아직도 우릴 키운다고 생각해?”
“그럼..... 어쨌던 아직은 내 품안에 있으니까...”
그말이 가슴속에 그대로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