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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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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BY 마음 2002-01-27

준우와 내가 함께 다녔던 덕산초등학교 앞에서 차가 멈추어섰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내리는 것 같다. 하긴 다음 정류장부터는 고속버스가 다니는 곳이기도 하니까 이런 직행버스는 고스란히 이 덕산사람들의 몫인 듯 했다.
“현희야! 여기까지 왔는데 큰집으로 바로 갈꺼야? 차도 잘 없을텐데..... 우리 희정이 아빠한테 좀 태워주라고 할테니까 우리집으로 잠깐 가자. 날씨도 추운데 여기서 기다리는 것 보다 백번 났지....”
희정이 엄마는 기어이 내 손을 끌어 당긴다. 큰댁이라고 해도 우리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것도 겨우 5년도 채 안되었다.
거기다 명절이라고 해도 엄마만 잠깐씩 내려왔지 우린 늘 핑계로 일관해 왔었지 않은가.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큰길가, 양쪽으로 늘어선 고만고만한 가게들이며 중간 쯤에 있었던 덕산약국은 아직도 그모습 그대이고 몇집 지나지 않아 있던 강변옥이라고 그 당시만 해도 중국집이었는데 지금은 영업은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인근에 큰 도시들을 끼고 있어서 일까. 상권이 죽어 버린 이곳이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오일장이 서던 곳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 대신에 비디오가게도 보이고 가스취급소도 보이고 치킨전문 분점도 있는 것이 여느 도시에서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 주변에는 학원가가 생겨나고 옛날 연쇄점이 하나로마트라는 이름으로 제법 규모가 큰 할인매장으로 자리를 잡아있고 그것 말고도 구멍가게서너개 정도를 합쳐 놓은 것 같은 규모의 매장들이 생기는 바람에 작은 구멍가게식 수퍼는 이미 제 구실을 못해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분명 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래도 사람들 생활은 참으로 많이 윤택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품점이라고 하지만 수선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였다. 찾아가지 않은 옷들이 반듯하니 다림질되어져서 걸려 있었고 한쪽 벽면으로는 겨울 옷도 아니고 블라우스 종류가 나란히 걸려 있거나 편하게 입는 바지 종류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제법 솜씨 좋은 재봉사였는데 이젠 그저 늘이거나 줄이거나 하는 수선만을 하고 있는 희정이엄마를 보면서 괜히 허전한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양반이 오늘 같은날도 집에 없네..... ”
수화기를 들더니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나 보았다.
불과 삼분도 안되어 희정이 아버지가 가게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아이고 현희 아니야... 많이 이뻐졌네.... 그래, 엄마는 편안하시고....? ”
여전히 얼굴이 좋으셨다. 오히려 희정이 엄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것이 아직도 그냥 그러고 노시는 모양인데 왠 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정이 엄마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희정이아버지를 가게밖으로 내몰았다.
“현희 바빠요. 제네 큰집에 다니려 왔는데 거기가 어디 보통 거리여... 당신이 좀 데려다 주구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송화담 바로 밑이지? 아마.....”
“네....”
하얀색 소나타였다. 구형이긴 했지만 이 겨울에도 깨끗하니 세차가 된 것을 보니 희정이 아버지가 아마 애지중지 하는 모양이다.
뒷자석에 앉아서 그 어색한 시간을 오분 정도 지났나 싶은데 벌써 큰댁 대문 앞에 까지 와 있었다.
한대수라고 적혀 있는 명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옛날 그 육중한 나무 대문은 온데 간 데 없고 나지막한 철 대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 와 본 것도 아닌데 그 철대문이 꼭 할머니가 계시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럴까. 내가 느꼈던 큰댁에 대한 거리감도 이 대문 하나로 완전히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문을 조금 밀어 본다. 활짝 열어 두었던 그 옛날 그 대문하고는 달리 잠겨 있을 것 같은 철대문은 너무도 쉽게 열렸다.
안채가 우뚝 솟아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보니까 꼭 그렇지 만도 않다.
그저 조금 오래된 집처럼 보여서 그렇지 여느 농촌집처럼 평범했다.
할머니가 거주하시던 안방에서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어머니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아버지가 미워서 지금까지도 당신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어쩜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 보다도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산만한 배를 안고 누워서 숨을 헐떡거리던 아버진 오로지 당신 생각만 하는 위인이었다.
딸인 내 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데도 아버진 내게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렇게 가 버린 것을...... 아무리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라고 하지만 그 때, 누렇게 변해 버린 아버지의 해골 같은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큰엄마!!”
목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내 몸은 더 움추려 있었다.
“누구여?”
큰엄마가 나온 곳은 방이 아니라 곳간이었다. 부엌 옆으로 아직도 남아 있던 그 곳간에서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오고 계셨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현희 아니여?”
“큰엄마.......!”
큰엄마는 늘 이랬다. 우리를 보면 그저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친엄마보다도 어떨땐 더 마음이 가기도 했었다.
“니가 왠일이냐?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냐? 버스도 이 시간에는 없는데.....”
“역전에 희정이 아버지 차 타고 왔어요. 우연하게 만나서....”
“그러냐.... 잘 왔다. 잘왔어..... 가끔씩이라도 와야지.... 여기가 어디 못 올 집인냐.....”
내 손을 끌고 대청마루를 지나 할머니가 기거 했던 안방으로 들어 갔다.
이미 그곳은 할머니 방이 아니었다. 자개농이 턱하니 안쪽 벽면을 전부 차지 하고 있었고 그 직각으로 티브이가 놓여진 문갑이 같은 자개장으로 만들어져 깔끔하고도 잘 정돈된 것이 전혀 다른 방이 되어 있었다.
“니가 올려고 그랬는지 괜시리 이 연시 생각이 나더라....”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연시였다.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면서 큰아버지도 K시에 잔치가 있어서 나가시고 식구래야 이제 둘만 남아 있으니 이집도 크구나 하신다.
아랫목에 깔아 놓은 담요가 그냥 담요가 아니라 옥장판인가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 위로 올라가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 부근이 금방 뜨끔뜨끔해지는 것이 갑자기 엄마 생각을 하고 만다.
“큰엄마! 큰아버지 계시면 사실 나 오늘 그냥 가야했을 거예요. 큰엄마한테 사실은 아주 특별한 상의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뭐냐? 니가 날 만나려 오다니.....” 큰엄마의 입술이 얇게 웃고 있다.
“..................”
긴 한숨이 또 한번 뭉턱 빠져 나가고 있었다.
“얘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게냐?”
“큰엄마..............”
나는 기어이 울고 말았다. 설움이 북받쳐서 큰엄마 무릎위에다 얼굴을 파 묻고 울고 말았다.
“아가......아가......” 당황한 큰엄마는 내 등을 토닥이면서 어쩔줄을 모르신다.
화장지를 내 손에 쥐어 주면서 다그쳤다.
“무슨 일이야? 니가 왜 이러니? 니가 왜 이래?”
“큰엄마!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이에요?”나조차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말이야? 누가 뭐라고 했는데....? 응? 니가 왜?”
큰엄마 역시도 충격을 받았었던지 가슴을 쓸어 내린다.
“큰엄마! 숨기지 마시고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좀 말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저 이대로 죽을지도 몰라요.”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 거침없이 터져 나온다.
“현희야! 무슨 그런 험한 말을 한다니? 자초지종을 얘길 해야지.... 무턱대고 이러면 어쩌냐?” 큰엄마의 투박한 손이 내 눈자위를 만져준다.
“그만 울고..... 왜 그러는지 차근차근하게 얘기 해 봐라. 니가 왜 이러는지....”
“큰엄마! 나 누구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결혼까지는 아직 말하지는 않았지만 둘 다 당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요. 준우라고..... 옛날 덕산 역전에 살 때 우리집 근처에 살았던.....왜 그 아이 엄마가 요기서 조금만 더 가면 있는 상리라고 그곳이 친정이라고 하던데......그 아이 아버지가 K시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큰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끝도 없이 늘여 놓는데 큰엄마가 내 말을 끊으면서 지난번 현주 결혼식장에 왔던 그 엄마? 하신다.
“그집 아들이라면......너의 엄마가 무척 좋아 할텐데...... 그날도 보니까 준우엄마 보다 너의엄마가 어찌나 반가워 하던지..... 그런데.....어쪘다는거냐?”
“큰엄마! 그 엄마가 절 한번 찾아 왔었어요. ”
“준우가 얘길 했나보네......”
“그런데요. 우리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시면서......이상한 말을 하고 가시길래....”
“무슨 말? 왜?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안 된다네요.... 우리 엄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사돈이 될 수 없다네요....”
“...................”
큰엄마 역시도 이 상황에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날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