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왔다.
참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터미널 안에서 이렇게 기다려 본 것도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삼십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갑자기 막막해져서 주위를 두리번 거려본다.
몇 개 되지 않는 의자엔 이미 사람이 혹은 짐들이 자리를 다 차지 하고 있었고 이층에 보이는 터미널다방이 순간 눈에 들어 왔지만 잠깐 망설이다 출입문 쪽 유리문으로 다가서 있었다.
긴코트를 입고 있는데도 무릎부근이 설렁하니 춥다. 그러고 서 있는 날 사람들은 흘끗거리면서 지나가고 왠지 어색한 기분마져 들게 해 가판에서 ‘좋은생각’이라는 손바닥만한 월간잡지 한권을 사서는 그곳에다 고개를 쳐 박고 있었다.
하지만 삼십분이란 시간을 떼우는데에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십여분을 남겨 놓고 버스가 대기하고 있을까 하는 맘에 승강장 쪽으로 나와 버렸다.
덕산. 방면 라인에 들어 서 있는 낯익은 버스, 반가운 마음에 창가쪽으로 자리 하나를 잡고 앉으려는데 혹시나 아는 이의 모습이라도 보게되려나 했더니 역시나 누군가 아는척을 한다.
“혹시 현희 아니냐?”
앞자리에 앉아 있던 파머머리의 중년 아주머니 한분이 아는 척을 해 온다.
“네, 맞는데요......” 그 주름 투성이의 아주머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나 모르겠냐? 희정이 엄마....”“아.........예.........”
큰길가에서 양장점을 하고 계셨던 희정이 엄마, 이젠 그것도 집어 지우고 그 자리에다 양품점을 차려 놓았다고 한다.
“안녕하셨어요. 희정이는요?” 현화하고 같은 또래였는데 내 기억으론 꽤 미인형이었던 것 같다.
“가는 지금 인천에 있다. 그 뭐라고 하냐 스튜디어슨가 뭔가 하는....”
“아...스튜어디어스요? ”“그래, 지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해서....”
“그래요? 그거 잘 됐네요. 원래 예뻤는데..... 더 예뻐졌죠?”
“저거 아버지 닮아서 키가 훌쭉하니 커지.. 니도 어디 보통 인물이냐? ”
“.................” 그저 피식 웃었다.
“야야! 그건 그렇고 너희 엄마는 아직도 혼자야?”
“예? 네.............”
“쯔쯧..... 아이구........... 이젠 좋은 시절도 다 갔구만 이태까지 뭐하고.....시집이라도 가지....”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혼자말처럼 해 버리고는 다시 말을 뒤이었다.
“너희 기 안 죽이겠다고 그렇게도 악빠리처럼 살더니 여기 이사와서도 너희들 생각 밖에 안 했나 보네... 너희 엄마, 덕산 살 때에도 얼마나 사내들이 시덥잖게 끓어 샀던지....”
날 갑자기 의식을 했는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자신을 타박까지 한다.
“내가 미쳤지... 널 붙들고 무슨 말인냐... 하지만....... 니도 이제 다 안 컸나.... ”
버스는 꼭 제 시간에 터미널을 빠져 외곽 도시풍경으로 이어졌다.
희정이엄마는 한참을 이거저것 물어보더니 차가 출발하니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희정이 엄마라면 엄마보다도 오히려 아랫 연배 쯤 되었을텐데 얼굴의 패인 주름살로 봐서는 아직도 희정이 아버지 술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다.
평소에는 얼마나 점잖은지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을 띠는 사람인데 어쩌다 술 한모금만 들어가면 정신이 나가 버리는 사람이었다.
희정이가 그것 때문에 우리집에도 몇 번 피신을 올 정도여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가끔씩은 그 엄마까지도 우리집으로 뛰어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아마 우리집에 아버지가 안계신 것이 그들이 숨어들기에 그나마 마음 편한 곳이었던 것 같다.
머리를 잠깐 등받이에다 기대고 눈을 감았다.
책이라도 가지고 올 걸. 지금 이러고 다닐 여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까지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준우엄마를 만난지 한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그의 애인으로 지낸다는 것이 영 편치가 않았다.
대답은 해 주지 않았지만 그 분의 뜻을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제부턴가 알수 없는 분노가 마음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집안 차이나 아비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것을 반대의 이유로 내거는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그 무언가가 늘 궁금한 채로 지금까지 그냥 방치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절대 그냥 넘겨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에게서 아니면 큰엄마한테서든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 듣던간에 엄마에 대한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알아내고 말겠다는게 지금의 내 결심이다.
준우와의 결혼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뒷목이 뻐근해 오는 것이 뭉턱 숨 하나를 토해내어 놓는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공원묘지 앞을 지나고 있었다.
보기에도 너무 선명해 보이는 색감으로 만든 조화들을 승강장 옆에다 늘여 놓고 파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들어온다.
이런 추운 겨울에도 바람막이 하나 없이 한손에 노란색, 보라색이 조화롭지 못한 모습으로 오히려 어떤 거부감을 주는 플라스틱 꽃을 들고 서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은 그저 눈만 보이게 둘려 싼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얼마나 꺼 입었을까. 손님 하나를 내려놓고 차가 그곳을 떠나는데도 나는 그 아주머니가 그 내린 손님한테서 손에 들고 있던 그 꽃을 팔수나 있을까 하는 데에 마음이 가 있었다.
한데 그 손님은 그 아주머니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는 곧장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슴 하나 가득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햇살 때문에 또다시 커텐을 닫고는 눈을 부쳤다.
그 어둠속에서 갑자기 사내들이 들끓었지 하던 희정이엄마의 그 묘한 표정이 걸려내어지지 못하고 내게 와 얹혀 있었다.
전혀 들어보지도, 직감조차도 가져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다시 희정이엄마를 붙들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엉켜드는 것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제 오후에 들렸던 엄마가게는 온데 간데 없고 전파상 하나가 들어서 있는 것도 그렇고 뭔가 말해줄 것처럼 하다가 종종 걸음으로 도망가 버리던 그 중년의 아저씨도 내 머릿속에 뒤죽박죽으로 엉켜져 버렸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숨조차 쉬기 힘든 답답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