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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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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BY 마음 2002-01-17

“아직도 눈이 오니?”
“벌써 거진 끝났나보던데......눈구경 좀 하나 싶더니.....”
동생 현화의 얼굴이 이뻐 보인다.
자그마한 얼굴에 아직 화장기라고는 전혀 없는 현화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문득 준우의 엄마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하고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현화는 나하고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달랐다.
이 아이한테서는 나한테 있다는 그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이 그렇게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화는 최소한 나처럼 가슴으로만 사랑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는 그런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런 아이가 되어 있는가.
웃고 있어도 슬퍼 보이는 얼굴, 함께 근무해오던 사무장이나 변호사님한테서도 그런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타고난 성격이러니.....
변호사님 얘기로는 너무 진지해서 그렇다고 했다가 모범생콤플렉스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했다가 맏이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나의 성격이나 표정들이 전부 콤플렉스에서 오는거라는 결과가 나온다.
벌써 5년을 한 직장에서만 근무해온 것만 봐도 내 성실성은 이미 인정을 받은 셈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는 늘 그렇게 자신감이 없었다.
준우가 대학 3학년때였다.
제법 큰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일류급 호텔에서 K고 동문에다 K대를 다니는 나름대로 대단한 자부심 하나로 뭉쳐 있는 동문 페스티발에 따라간 적이 있다.
규모만 해도 내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넓은 홀, 둥근 원을 그리며 놓여진 엄청난 수의 의자들, 그 앞으로 마련된 화려한 만찬테이블이며 가슴에는 다들 장미 한송이씩을 무슨 훈장처럼 달고들 있었다.
생전 처음 보고 느껴 보는 그 낯설음은 시종일관 날 긴장시켜 놓기에 충분했었다.
맥주 한잔이 이미 내손에 쥐어져 있는데도 준우 친구라고 말하는 아담한 체구의 안경을 낀 너무도 평범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건지 아니면 만화에서 흔히 보는 케릭트를 닮았다는 생각도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빈잔을 내밀고 그 컵에다 맥주를 따른다.
“김용이라고 합니다. 미인이시네요.”
나이에 맞지 않게 그의 웃음이 음흉스러웠다.
“네..... 안녕하세요. 한현희입니다.”
“어째 한송이 수선화 같습니다.”
그때였다. 준우가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다.
“야! 그만해라. 뭐하는 거야?”
“그냥 해보는 소리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래, 알았으니까 네 파트너나 잘 좀 챙겨라.”
“근데 혹시 우리 학교 학생 아니예요?”
그 친구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간단한 대답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야! 김용, 그만 좀 하라니까 우리 학교 아니야.”
“아.... 예...... 많이 뵌 분 같기도 하고 해서......”
“보긴 니가 언제 봤다고..... 니 파트너나 소개 좀 하시지....”
준우가 슬쩍 날 훔쳐 보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 친구의 파트너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이런 페스티발은 처음인데 그 쪽은 어떠세요?”“저 역시....”
“백쌍이 넘는다고 하죠?”
“글쎄요.....”
“몇 학년이세요?”
“.............”
웃고 말았다.
“설마 벌써 졸업하진 않았겠죠?”
“네.........”
등에서 후끈 달아 오르는 열감을 느꼈다.
준우가 그때 내 손목을 낚아서 무리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마침 블루스곡이 그 무리들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는데 준우가 귀엣말로 속삭인다.
“너 오늘 진짜 이쁘다.”
“............”
“편안하게 즐겨. 니 옆에 내가 있잖아......”
“...............”
대답대신에 그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는 살풋 웃어 주었다.
미안한 마음에 생각 같아서는 그의 이마에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생전 처음 춰 보는 블루스곡이 아닌가.
남자를 껴안고 음악에 맞추어 이런 춤을 추고 있는 내가 무슨 호사 같아서 영 어색하기만 했다.
저녁 아홉시가 넘어가는데도 그 파티는 계속 되었다.
준우의 손을 끌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긴 호수 주변을 참으로 오랜 시간을 걷기 시작했다.
약간의 알코올기가 남아 있었던가 어지럼증도 조금씩 느꼈었는데 그가 내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
“밤공기가 오늘처럼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어. 너와 지금 이러고 있다는게 꿈만 같애. 넌 안 그러니?”
“나도 그래....”
“그게 다야.....?”
“아니! 달빛도 좋아.....”
“묻는 내가 바보지....”
“왜 삐졌니?”
“하여튼 너 분위기 없는거야 뭐!”
“좋아..... 그럼 나도 오늘 한번 쏜다.....”
“어쭈.....얘 보래......”
“나 좀 안아줘.............”
“안고 있잖아.”
“아니..... 그렇게 말고.........”
벚꽃이 거진 다 떨어져 버린 가로수길 위엔 아직도 사람들 발에 뭉개어져 가는 꽃잎파리들로 늘여져 있었다. 그 위를 우리가 잠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그의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준우와 다시 만난지 겨우 일년, 그 사이에 이렇게 까지 편해질 수 있었나
그에게 왜 나는 늘 이렇게 당당하기만 한 걸까.
그러고 보면 준우에게만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