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도 끝나고 국시까지는 거의 한달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한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져 왔다. 퇴근하고 다시 도서관이나 독서실 같은데를 다녀야 하는데 지금까지 늘 그렇게 옆에 있어 준 준우에게 또 다시 그런 일을 시킬수도 없고......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남들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산다던데,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올해 아니면 내년?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문제인데도 좋은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더니 경비아저씨가 도서관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집에다 전공책 무게만 해도 왠만한 갓난쟁이 무게하고 맞먹을 정도였다.
가슴에 그것들을 끼고 도서관을 나설 때면 그래도 뿌듯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다니는 지도 모른다.
교문까지의 캠퍼스길은 지은지가 꽤 된 학교여서 그런지 제법 굵은 거목들도 군데 군데 있고 교문을 빠져 나오는 오십여미터 정도의 가로수 터널이 학교의 명소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오지마라고 그렇게 말해 두었는데도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답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얼마나 의지를 보이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하는, 어찌보면 융통성도 없고 답답해 보이기가지 한 그가 왜 내게 이다지도 깊이까지 들어와 있는 걸까.
그의 엄마가 내 엄마에게 느꼈던 동정심이나 준우가 내게 느끼는 연민 같은 것이 어쩌면 비슷한 무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로 치장을 한 준우의 마음이라면 나는 그럼 무엇인가.
준우에 대한 내 마음은......하지만, 불행을 훤히 눈앞에 두고 그 길로 들어갈 자신은 없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은 엉켜드는 바람처럼 쓸쓸하기만 한데......
준우가 보이지 않았다.
왜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드는지.......
분명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까지 하면서 말해놓고서는 그를 기다렸던 내 마음이 내가 생각해도 어쩔수 없는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승강장에서 내려 동네 큰길로 들어설때였다.
“어이, 아가씨! 이렇게 밤늦게 다니면 써나. ”
준우의 바리톤 목소리는 알맞게 날 녹여주는 감미로운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나는 쪽으로 내 몸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걱정이 되어서 안 와 볼 수가 없었다며 그가 씩 웃고 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거니 난 이미 네게 끝도 없이 끌려 들어 갔는데..... 헤어나오기 힘든 그 행복을 이미 알고 있는데.....’
“배안고프니? 뭐 좀 먹고 가자. ”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는 중이거나 이미 닫혀진 상태였다.
“나오지 마랬잖아. 내가 뭐 어린앤가. 이제 너 없이도 잘할 수 있는데 꼭 니가 날 이렇게 꼼짝없이 어린 아이로 만들어 버리더라!"
“갑자기 그만 둬 버리면 탈라지. 안 그래?"
“장난 아니야.”
이젠 그에게 부담이 되는 것들은 안 하고 싶었다.
당연한 것처럼 그의 보살핌을 받아온 나지만 이젠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나 먼저 갈께. ”
내 목소리에 슬픔이 베여 있다.
금방이라도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울음이 언제부턴가 늘 목언저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늘 하던 행동이지만 내가 봐도 지금의 내 행동은 평소하고는 많이 달랐다.
눈 인사라도 하고 알게 모르게 장난끼를 부렸던 평소하고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현희야.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다녀야 하니?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어.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구시대적인 이런 행동들, 이제 정말 싫다.”
“안돼, 우리 엄마는 아직 몰라. 아직은 알게 하고 싶지 않아.”
“왜? 내가 그렇게 부족하니?”
“그게 아니라는거 몰라서 그래? ”
“그래, 정말 모르겠다.”
“언젠가는 네게 이야기 해 줄 날이 올거야. 아직은 나도 뭐라고 말 못하겠어. 그러니까 ....”
그에게 달리 내가 해 줄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확실해진 것이 없는데......
나는 더 이상 엄마와 준우 엄마사이에서 저울질이나 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 결심은 순간적이었지만 준우, 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내 도리라는 생각을 깨달은 것이다.
처음 이 동네로 집을 알아다 봐 준것도 준우가 한 일이다.
어차피 우리는 그 당시 다시 이사를 해야 할 입장이었고 학교하고도 가깝고 준우네하고도 가까운 곳이어서 일부러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는 이미 내 보호자였다.
그것이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오히려 무감각해져 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그가 내 일부가 아니라 남이라는 사실이 눈에 보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 지난번 엄마 일 있고부터 계속 이런다는거 알고 있니?”
거의 집까지 다달았는데도 우리 사이에 이런 심각한 말은 계속 꼬리를 물고 있었다.
“너희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마! 그건 아니야. 단지 내가 언제까지나 니 보살핌 속에 살아야 하는지.... 그걸 걱정하는거야. 너도 떠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 동안은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이젠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너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애.”
“뭘 알 수 있다는 건데?”
“너와 내가 어떠한 관계인지 부터 다시 되집으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난 너를 단 한번도 따로 생각해 본적이 없어. 넌 이미 내 일부가 되어버렸어. 니가 아니라고 해도 난 그래. ”
그는 늘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단호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 줘. 신중하게 다시 한번 더 우리가 인연의 고리를 맺을 수 있는지부터 말이야.”
“현희야! 네가 자꾸 이러는 거 분명 우리 엄마 때문이야. 그렇지?”
“전혀 없다고는 말 안하겠어. 하지만 결혼이라는 말이 우리하고 전혀 무관한 얘기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이야? 결혼해 달라고 내가 정식 청혼을 안했기 때문에 이러는 거니?”
“너야 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 나이에 무슨 결혼은?”
“니 나이가 지금 몇인데? 니만 괜찮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의 입가에 장난기가 보인다.
“나는 지금 심각해. 우리 냉정하게 생각 좀 해 보자. 우리가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서로에게 그렇게 필요한 존재인가를.."
“우리 사이가 그렇게까지 복잡하니? 결혼이라는 거,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라는 것은 너도 마찬가지 생각 아니야?”
“사랑? 그것 하나로 전부가 다 해결되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너와 나 사이에서야 그것마고 더 필요할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아니야. 난 자신 없어 너와 결혼한다는 사실만큼은.....”
그의 한쪽 팔이 갑자기 네 어깨를 감아 왔다.
“무슨 짓이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무슨 짓이라니?”
“미안해. 이제 그만 가.”
“못가. 너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지금 당장 너희집으로 찾아 갈꺼야.”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 봐. ”
“나 너무 힘들게 하지마. ”
그의 말이 애잔하게 내 속에 들어와 박혔다.
‘미안해 준우야. 정말 네게는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