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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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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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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BY 마음 2002-01-05

인근 도시에 국립대학도 있는데 굳이 할머니는 서울이라는, 기차로도 반나절이나 걸려서 가는 그런 곳에다 유학을 보냈다고 했다.
집안에 판 검사 하나는 나와야 그래도 내 놓을 만한 집안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보내 놓은 서울 유학 생활을 불과 이년도 못가서 자진 휴학을 해 버리고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했다. 할머니가 서울까지 올라가셔서 친구들을 만나려 다녔지만 하숙방을 함께 쓰고 있던 친구조차도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짐작을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정작 그가 다시 고향집에 나타났을 땐 어린 딸 둘에다 병까지 얻어서 도무지 옛 얼굴을 찾기 조차 힘들만큼 변한 모습이었는데 그동안 무얼하며 살았는지 끝내 아무런 말도 해준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큰엄마가 내게 해준 아버지에 대한 얘기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의 전부이다.
엄마는 단 한번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구체적으로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얘기를 해 줄 것처럼 말했지만 엄마에게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은 짐작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를 다그쳐서 묻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말해 주고 싶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마의 몫일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일을 내가 컸다고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전부가 외출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한다고 난리라니... ”
“그래도 그나마 같은 K시 안에 있는 예식장이어서 다행이다.”
동생은 아침부터 볼멘 소리를 해대며 짜증을 부려댄다.
“현주 언니 못 본지도 꽤 되었지? 그때 현덕이 오빠 결혼식때 보고 아마 처음일 걸,”
“언니야, 나 꼭 가야 돼? 아이시... 싫은데...”
“너 엄마한테 그런 소리 하지마...”
“엄마는 왜 갑자기 요사이 들어 그렇게 우리를 못데리고 다녀서 난리야.”
“그걸 모르겠니? 왜 그러시는지?”
“뭐! 이제 언니도 나도 다 대학생이니까 자랑이라도 하고 싶다 뭐! 이거야?”
“엄마가 그러는 것도 다 그 만큼 엄마 당신이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보상이야. 그 정도도 못해 주겠니?”
“언니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쉰내가 나! ”
“뭐? 그만두자. 세대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세대차이가 아니라, 언니는 아무리 봐도 요사이 애들 같지가 않어, 언니! 남자친구 있지?
다 알고 말하는 거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 말고...“
“남자친구는 무슨 남자친구?”
“그래, 계속 그렇게 내숭이나 떨고 그러셔...”
“뭘 보고 그런 소릴 하니?”
“언니는 그래서 내가 쉰내니 뭐니 하는거야. 순진한거야... 아니면 내숭이야...?”
“가시내! 너 계속 그럴거야?”
“요사이 애들의 특징이 뭔지나 알어? 복잡한 것은 딱 질색!”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언니처럼 늘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세상 고민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고 사는 거 그거 진짜 밥맛이야.”
여기까지 듣고는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누르기에 온 힘을 쏟았다.
‘너처럼 니 생각만 하고 너 힘들면 힘든 거고 너 싫으면 무조건 싫은거, 나도 그러고 싶어...’
엄마는 오랜만에 우리들을 앞세우고 일가 친척들을 만나려 갈 것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다.
아침 일찍 목욕탕으로 미용실로 바빴다.
우리들한테도 벌써 일주일 전에 무슨 옷을 입고 갈 것인지 물어왔고 늘 입고 다니던 겨울 코트를 새로 장만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어제 토요일 오후에 기어이 우리들 손을 이끌고 나가 동생은 요사이 유행한다는 더플코트를 빨간색으로 사 입히고 나는 몸매가 그대로 다 드러나도록 딱 맞게 나오는 검정색 긴모직코트를 사 주었다.
엄마는 겨울용 두루마기에다 흰색 토끼털로 만든 쇼올을 걸치고 우리를 앞장 세워서 택시를 잡았다..

명인타워안에 있는 명인 웨딩홀, 샹뜨리에가 최근에 지어진 웨딩홀답게 세련되고 또 화려해서 어떤 기준을 대신하는 것 마냥 요란스러웠다.
“동서! 정말 보기 좋으네... 현희, 현화, 둘다 어쩜 저리 이쁘게도 컸는지...동서 얼굴이 다 피는 것 같으이...”
“아이고 형님도... 현주처럼 예쁜 따님을 두신 분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엄마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를 늘 피해오다시피 해 왔던 엄마, 아직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아마 우리도 이런 자리까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봐도 할머니 돌아가시기가 무섭게 큰댁 출입이 잦아졌던 것 같다.
이제 겨우 오년쯤 지났건만 지난 세월을 죄다 덮을만큼 큰댁에 끔찍이도 잘하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와 동생 현화가 신부대기실로 막 갈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뒷전에서 내 발목을 잡았다.
“현희엄마! ”
“아니 이게 누구야. 준우 엄마? 세상에... 얼마만인지 모르겠네...그래 준우는 어떻게 되었어? 공부 잘했잖아.”
“아직도 공부 하고 있어요. K대 대학원 다니고 있지요. ”
“우리 현희도 여기 왔는데...”
엄마가 날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하고 신부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을 해 대는 데도 나는 능청스럽게 신부의 손을 잡고 그동안 자주 못 찾아 본 것에 대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고 있었다.
현주언니의 입술이 아버지 쪽 식구들을 닮아서 도톰하니 이뻤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쏟아놓은 쌀자루 모양 그것을 다시 수습하기에는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현화를 두고 혼자서 화장실로 찾아 들어갔다.
손을 씻으면서 내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은 내가 봐도 청승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밝게 웃고 있어도 이내 멋쩍어져 버리는,
나는 준우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 갑자기 그런 반문 마져 들게 했다.
왜 이리 슬프기만 한지...
가슴에다 깊이 심호흡을 시켜 보지만 뛰는 가슴은 쉽게 진정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