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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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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BY 마음 2001-12-27

창이 넓은 2층 커피숍의 창가자리, 햇살이 너무 비쳐서 오히려 긴장해 있던 터에 더욱 답답함을 주었다.
마주하고 앉은 준우의 엄마는 우리가 시킨 쥬스가 나올 때 까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단지 엄마의 안부를 걱정하듯 물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복잡하게 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쪽을 택했다.
“아직도 일을 나가신다 말이지... 그 고생 언제까지 할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더니 나를 다시 한번 빤히 들여다 보신다.
그 눈을 피하질 못하고 마주보고 잠깐 웃어 보였다.
엄마와 비슷한 연배, 하지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곱다.
진하지 않은 화장, 굵은 웨이브의 단정한 커트머리, 내 눈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털코트는 그녀의 얼굴에 한층 더 여유를 보여주어 나를 보는 그 미소 마져도 내 주변에서는 보기드문 값나가는 보석처럼 보였다.
준우한테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기분이 나를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긴장시켰다.
그 긴장 속에 준우 엄마는 여전히 낮은 톤의 음성으로 한마디를 툭 던진다.
“현희가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딸은 아버지를 닮아야 잘 산다던데.....”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준우엄마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단번에 준우 엄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변하지 않은 모습도 있었지만 준우한테서 느끼던 그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그의 엄마한테서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모자지간인데도 모녀지간처럼 닮았네 생각을 했었다.
그 순간 나는 지레 겁먹은 눈을 하고는 떨려오는 가슴을 달래려고 짧게 짧게 심호흡을 했었다.
“현희 맞지?”
잠깐 사무실 동정을 살피시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는 낮은 소리로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재확인을 하는 표정이시다.
“네.......”
“나, 준우 엄마, 기억하니?”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떻게...?”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준우엄마의 말씨는 인스턴트 커피처럼 건조해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뒤따르는 것만 같았다.

우리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준우네 엄마는 다소곳하니 앉아서 그저 앞에 가져다 놓은 쥬스잔만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현희야. 준우한테 대강 얘기 다 들었어.... ”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거두절미 하고 한마디만 하자. 너희들,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준우한테고 너한테고 간에 너희들이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게 되면 일이 보통 복잡해지는게 아니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신다. 그리고 또다시 말을 이었다.
“준우한테서 너하고 사귄다는 정도만 들어 알고 있는데... 그래... 친구로 지내.... 이성친구도 친구는 친구니까. 결혼은 그렇게 쉽게 맺어지는 인연이 아니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남자들은 여자들 하고는 또 달라서 할일이 많잖아.... 준우 아직 군에도 안 갔다 왔고... 그거야 대학원 마치면 장교로 갔다 오면 될 터이지만 아직 결혼 운운할 나이가 아니라서... ”
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다.
“현희야! 사실 오늘 여기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온 것은 너희들이 철없이 일이라도 저지를까봐 그게 겁이 나더라. 요사이 애들 영 겁들이 없어 가지고 말이야... ”
준우네 엄마는 잠시 허둥거리는 듯 해 보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얼굴을 피하는 듯 고개를 돌리시고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 붙였다.
“나는 니네 엄마하고 악연 만들고 싶지가 않어...내말 뜻, 넌 이해 못하겠지만...”
말을 하는게 아니라 흘리듯이 하고는 내가 할 사이도 없이 만원짜리 지폐한장을 카운트에다 내어 주고는 거스름도 안받고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재빠른 몸은 아직도 내겐 엄마뻘이라기 보단 큰언니 정도의 느낌만 가져다 주었다.
한차례 소나기를 맞은 기분이다.
허허 벌판에 서서 고스란히 그 큰 장대비를 맞고 난 뒤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같은 건물에 있는 커피숍이어서 익히 알고 지내던 서어빙하던 미스강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날 끌어다 다시 자리에 앉혔다.“잠깐 쉬었다 가요... 내가 커피한잔 갔다 줄 테니까....”
그때였다. 핸드폰소리가 요란하게 날 깨운다.
사무장이다. 변호사님이 오셨다며 아직도 얘기 중이냐고 묻었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오는데 미스강이 소리 지른다.
“그렇게 해가지고 가겠어요. 좀 쉬었다 가지...”
그녀의 말이 귓전에서 왱왱거리는데 내 눈 앞에는 온갖 사물들이 투명 막 하나는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눈을 떴다 감았다. 이마를 차가운 내손으로 몇 번이나 식혀가면서 엘리베이트 단추를 눌렸다.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게 있는 거야.
아니,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그러한 인연이란 게 있는거야.... 좀 더 구체적으로 그와의 관계에 끼어 버린 준우의 엄마,
난 그 분의 얘기를 조금도 서운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불안하게 맺여진 인연이었다. 이쯤에서 나 혼자서 간단하게 마음을 접고 무대 밑으로 빠지면 그뿐이다.
그게 아니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될 그 어마어마한 사건들 속으로 내가 강한 무장을 하고 마음 독하게 먹고 다시 일어나 들어가야 한다.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나처럼 말 한마디 못하고 당하기만 했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준우 엄마 앞에서 말한마디 못하고 그저 듣기만 하고 있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