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엄마를 따라 처음 큰아버지댁으로 찾아 가던날이 아마 아버지 부고 소식을 듣고난 뒤였던것 같다.
나무로 만든 대문에 걸려 있는 큰 빗장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엄마 손을 더 힘껏 잡았었다.
우리집에 몇번 다녀갔었던 큰 엄마가 우리를 보더니 얼마나 반가와 하던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앞치마를 당겨다 눈물을 닦으셨다.
“이렇게 일찍이 가실거면서...... "
큰엄마는 아무래도 우리 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손을 끌어다가 비벼 주시기까지 했다.
“형님! 애들 아버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울음이 베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 큰 집을 뒤흔들어 놓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니 년이 와! 이...개... 부랄 같은 년아! 내 아들 살려 내라 이년아! 금쪽 같은 내 아들 살려내! 니 년만 아니었으면 판,검사 될 놈이었어! 어디서 굴려온 화냥년 같은 걸 만나서 지 목숨까지 재촉해서 가게 될 줄도 모르고....”
할머닌 다짜고짜로 엄마의 머리채부터 잡아 뜯었다.
동생은 기겁을 하고 울고 나는 힘을 다해 할머니를 밀었다.
“아이구 어머니! 애들 생각 좀 해서 이제 그만 하세요.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큰엄마의 역성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괴성은 계속 되었다.
“어머니! 동네 챙피하게 왜 이러세요. 재건이가 그래도 그나마 자손이라도 남기고 가 주니 다행이다 해야지 이제와서 뭘 어쩌자고 자꾸 이러십니까?”
큰아버지의 점잖은 말투에 한풀 꺽인 할머니가 뜨락에 퍼지르고 앉아서 한참을 꺼이꺼이 우시고 계셨다.
그 사이에 큰엄마가 엄마를 아버지가 있다는 안방으로 안내를 했고 우리는 다시 큰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부엌으로 들어갔다.
“너희들 불쌍해서 어쩌면 좋으니? ”
연신 눈물을 훔쳤다가 다시 내손을 잡았다가 하시던 큰엄마가 우리에게 콩강정을 소반에 담아서 아궁이 앞으로 내 놓으면서 우리 손을 다시 비벼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따뜻한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땅콩이 들어간 콩강정맛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난 뒤로도 우리는 그 곳을 금방 떠나지를 못했다.
할머니한테 그렇게 까지 당해 가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것도 다 우리들 때문이었다고 했다.
뿌리도 없는 자식, 취급 당할까봐 그래서 그랬다고...
그렇게 그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엄마가 겪는 수모는 미리 한켠으로 밀쳐 놓은 듯 했다.
엄마는 식당 허드렛 일을 도와주면서 근근이 우리들을 공부시켰다.
하지만 단 한번도 수업료를 미룬 적도 없었고 동생은 그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옷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오히려 더 잘 입고 다녔고 내 용돈도 책 사 볼 돈이라고 따로 챙겨 주시던 엄마가 어느 날 우리들을 앉혀 놓고 이사 얘기를 꺼냈다.
동생은 K시로 이사한다는 말에 신이 나서 연신 우리 이제 촌놈 아니지 그지? 해대며 좋아라 했었다.
그 때가 중3때였다.
모진 수모에도 잘도 견디더니 이제 더 이상은 견디기가 힘드나 보다 생각했다.
한데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3년 터울로 난 우리 자매가 나란히 상급 학교로 진학을 앞두고 있었던터라 엄마 생각은 지금 하고 있는 식당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K시로 이사를 나오자마자 엄마는 미리 정해둔 직장이라도 있는 것 마냥 자정이 다된 시간에야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엄마는 그 때부터 덕산에서 식당 허드렛일을 할 때와는 비교조차 안될만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화장이며 옷이며... 예전의 엄마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낯설고 싫어서 한번은 마음 먹고 대든적이 있었다.
창피하게 꼭 술집여자들처럼 하고 다닌다고...
그 때 엄마는 여러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남이 내 인생 살아 주는 거 아니다.
그리고 여기는 도시야..우리한테 아무도 신경 안쓴다. "
끝내 엄마는 아니라고 술집 같은데는 안나간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그날 밤, 아마 내 기억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그처럼 비참해 보인적이 없었다..
그 뒤론 줄곤 내가 빨리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해서 엄마 대신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