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말 그대로 한지붕 세가족이다..
아니.. 큰오빠, 작은오빠네, 또 우리..
40이 훌쩍 넘은 그 나이에도 장가를 들지 못한 우리 큰오빠와 나보다
도 늦은 결혼에 이제 두돌된 아들을 둔 우리 작은 오빠..
그리고 어느새 고등학생이된 딸 둘을 가진 엄마가 된 우리 가정..
이제부터 지나온 내 이야기를 좀 하려한다..
불쌍한 내 팔자를 누군가는 이해하고, 위로해 주길 바라면서..
내 팔자가 불쌍하다고 처음 느낀건 둘째 딸을 낳고 나서였다.
우리 시집은 8남매가 모두 아들하나, 딸하나씩이다.
우리집만이 예외로 있지만 말이다.. 우리집은 딸만 둘이니까..
그렇다고 어째 시어머니란 사람이 와 보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나도 또 딸이란 소리에 마니 실망도 했지만, 여자가 딸을 낳는
데는 남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더만, 우리 시어머니는 그걸 모르신
다.
하지만 어쩌랴. 딸을 낳은 내 죄가 크다..
어차피 시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면사
포를 쓰지 못했으니까..
그러고나서 88년 겨울.. 드디어 면사포라는 것을 써 보았다.
그 누가 알았으랴.. 내 인생의 고난은 여기서 부터라는 것을..
1991년 첫 딸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여보세요? 유나 아빠? 유나아빠, 어디야? 왜 이렇게 안와~"
"어? 나? 여기 공장 사람들하고 회식하는 중이야.. 나 늦을거니까 먼
저 자~ 알았지?"
" 아니, 여.."
" 뚜뚜뚜..."
항상 이런 식이다. 내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면 그냥
전화를 끊어버린다. 하지만, 남편이기에 여지껏 참고 살아오고 있다.
기다린다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였다.
" 으~~악~~~!!!"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유인 즉슨 남편이 술에 취해 방을 들어오다가 엎드려 누워있는 나의
허리를 밟은 것이다. 난 이때의 충격으로 아직까지도 생리때만 되면
허리를 쓸수 없어 방안에 꼼짝도 않고 누워있다.
남편은 내가 소리를 지르는통에 술이 깼는지 왜 그러냐고 호들갑이다.
" 여보~ 왜그래? 어? 왜그러냐구!!"
난 그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나보니 병원 침대..
" 아~ "
고통을 호소하자 일어나는 남편..
" 여보, 미안해. 나 다시는 술 안마시기로 했어. 우리 빨리 돈 모아서
큰 집으로 이사가자. 어?"
" 애들은요? "
그게 깨어난 내 첫마디였다.
" 애들? 애들 잠시 장모님께 맡겨뒀어. 괜찮을꺼야. 애들 장모님 잘
따르잖아. 당신은 어때? 괜찮아? "
" 그래요? 나야 뭐.. 좀 아픈거 빼고는 괜찮아요.."
이렇게 해서 큰딸 학교는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잠깐이라지만, 그 잠
깐이 약 6개월 씩이나 됐었으니까..
이듬해.. 작은 딸도 큰딸과 같은 학교에 입학을 하게되었다.
다행이도 둘이 같은 학교여서 큰 딸아이가 작은 아이를 잘 데리고 다
녔고, 나 또한 친정집 바로 아래로 이사 왔기 때문에 조금은 편한 삶
을 살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때까지만 해도 작은 오빠도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인데..
우리 집은 가족들이 직접 만든 조금 허술하긴 하지만 꽤 넓은 집이었
다. 페인트 칠은 우리 아버지께서 손수 해주셨는데..
조금씩 편해진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에 자꾸 조그만 일들이 생겨왔다.
‥‥‥‥‥‥‥‥‥‥‥‥‥‥‥‥‥‥‥‥‥‥‥‥‥‥‥‥‥‥‥‥
제 주위 사람 실화를 바탕으로 쓴 글이예요..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누군가 자기 인생을 좀 알아줬음 한다구요..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을 좀 위로해 줬으면 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