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주 4.5일 근무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936

[제12회]


BY 마음 2001-11-23

그날 밤, 마음은 미스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게 찾아왔을 때의 그 공허한 눈빛이 내 마음에 이렇게 무거운 바윗돌이 되어 짓누르고 있는지...
하지만 미스리 앞에서는 그리도 모질어지는지...
그건 그날밤, 마지막으로 함께 보냈던 그날밤에 대한 내 항변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날밤에 대해 그 어떠한 말도 입 밖으로 내 놓질 않았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 가지였고...
그렇게 내뱉어 버릴 수 없는 말들을 서로가 가슴에만 담아 둔 채 서로에게 주는 눈길만 요란 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여린 입술이 꼭 다물어져 있음이 더 나를 힘겹게 만들었다.
나에 대한 미움이 그녀 속에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녀는 한차례 나를 몰아 부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저질려 놓은 일에 대한 그녀의 심경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것인지...
언제까지 그녀보다 더 느긋한 모습으로 나를 위장해야 하는지...

그녀는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그렇게 계절이 바뀌어 가는 것처럼 평이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듯 했다.

제법 가을이 깊어질 때로 깊어져서 세상이 온통 물들어 갈 즈음이었다.
결제 때문에 소장실에 들어 갔다가 괴이한 소리를 들었다.
“미스 박! 미스 리 그림실력 보통이 아니던데... 언제 배운건가? 간호과 나온 사람이...”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 그림이라면 윤미 쪽이지, 미스리가 무슨 그림을?
당연히 같이 사는 나는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제 이리 저리 쭉 둘려 보다가 연탄가스 걱정도 좀 되고 해서 미스리 부엌에 들어갔다가 그려 놓은 그림을 봤는데 정말 잘 그렸던데요.그거 미스리가 그린 그림 맞죠?”
내 무심함에 스스로 부끄러워 대강 말을 얼버무리고는 그녀의 부엌으로 내달렸다.

아무 것도 없는 부엌, 살림도구 하나 없는 그 곳은 이미 부엌이라기 보단 작은 아뜰이에 같았다.
이젤 위에 놓여 있는 스케치북, 그 속에 있는 하이힐 두짝의 모습이 금방 그리다 만 것처럼 제 위치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수채화 물감도 빠레뜨도 모두가 새것이었지만 그녀의 그림은 오랜 연습 끝에나 만들어 질 법한 수준작이었다.
수채화의 그 맑은 색체감이며 뚜렷한 명함처리, 잘 잡혀진 구도하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여린 듯한 얼굴엔 천박한 색끼만 잔뜩 들어있다고 생각해 왔던 나는 그녀의 얼굴로 이러한 그림을 그려 내는 것이 도무지 미스테리였다.

두툽한 스케치북의 앞장을 넘겨보았다.
붓 터치 연습을 한 듯한 그림은 아니고 줄만 그어져 있는 것과 스케치만 한 또 한 장의 그림도 함께 있었는데 안경을 낀 젊은 남자 그림이었다.
조금은 앳띠어 보였는데 그건 안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약간의 곱슬머리, 그리 크지않은 눈,
그러나 그 눈은 매우 이성적인 눈이었다.
반듯한 외모라는 생각이 그 그림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나는 곧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그라는 것을...
한데 내가 왜 그 그림 속의 그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미스리가 가지고 있는 아픔 때문인지, 아님, 그렇게 함께 뒹굴었다는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도 의연하고 깨끗해서 오히려 속이 상했다.
내가 상상해 오던 그 남자의 얼굴하고는 완전히 딴판이다.
미스리에게 은근히 손가락질 하며 칠칠치 못한 여자 취급을 해 왔건만 그 그림속의 남자를 보는 순간 미스리, 그녀가 겪고 있는 아픔이 더 절절하게 내게 와 닿았다.
이 무슨 편견인가.

부엌을 나오면서 그녀의 방문 앞을 슬쩍히 훔쳐다 보았다.
시커먼 비닐 봉투가 쓰레기를 담고 있는 듯 한쪽 구석에 끼워져 있고 그옆으로 먼지를 뒤집어 쓴 여름 샌들을 아직도 치우질 않고 있었다.
지나간 여름에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그것을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이 꼭 그녀의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윤미는 여전히 그 미술학원 뒷방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익숙해지는지 다른 얘기가 없었다.
바닷가의 여름이 가고 우리는 그녀가 그린 포구 그림만큼 쓸쓸한 가을을 맞이했다.

바닷가의 가을은 그다지 낭만적이질 못했다.
철 지난 바다에는 사람들 보다는 바람만 잔뜩 들어차 있고 파도 소리는 더 요란해 지고 뱃사람들만이 겨울채비에 그물들만 잔뜩 늘여 놓고 수선을 하고 있었다.

가을은 계절이 아니라고 했던가.
한 계절이 다른 한 계절로 가기 위한 길목일 뿐이라고 했던가.
그 길목에서는 그리도 아픈 상처가 있나 보다.
그래서 그리도 서러운 빛깔로 물이 들고 그 속으로만 삼켜 내는 피 울음이 있어서 끝내 그렇게 지쳐가는 것이구나.

윤미와 내가 뱉어 내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 되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그녀와 걷고 있으면 그대로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사랑이 되었다.

난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동성이었지만 난 그녀를 우정이라고 말하는데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말로 나를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녀를 영혼의 끌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었다.
그녀를 내 생활의 일부로 들여 놓기를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자리에 있음으로 더 가까이 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그녀한테서 느끼는 편안함인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