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0-
"그의 여자"
"얘가 누구냐구...!"
오히려 악을 쓰며 자신을 노려보는 이 여자.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의 등뒤에 선 여자는 영은에게로 덤벼들기라도 할듯한 기세였다.
그는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없이 영은을 볼 뿐이다.
그의 눈이 말하려는것을 영은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난듯 순식간에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영은은 볼이 후끈 달아오른다.
놀라고 상처받은 쪽은 자신인데 오히려
자신을 몰아세우며 따지는듯한 여자의 행동에 영은은 난감해진다.
나가려는 영은을 급히 붙잡은 그의 뒤를 따라온 여자.
그를 밀치며 영은에게 다가서려는 그녀를 그는 등으로 막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몸에서 강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여자는 술에 취한 것 같아보였다.
그녀의 용감한 행동도 술기운때문이었을까...?
"야!너 안비켜?민재!너...얘가 누군데 이래?비켜봐!"
한참을 그와 말없는 실랑이를 벌이던 여자는 기어이
영은의 앞을 가로 막았다.
다시 그가 자신을 밀어내려하자 그녀가 말했다.
"너...넌 누구니...?"
영은은 대답대신 그를 올려다 본다.
그가 말했다.
"영은아!그냥 가자.내가 바래다 줄께."
"가긴 어딜 가?"
여자는 조금 정신을 가다듬은듯 눈을 크게 뜨며
영은의 팔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에 영은은 당황스럽고 기가 막힌다.
"영은...?니가 영은이니...?"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
여자는 한동안 영은을 뚫어질듯 쳐다보다 그를 야유하듯 바라본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했다.
"얘하고는 어디까지 갔니?어린 애랑 놀아보니까 어때...?좋아...?"
거침없는 여자의 말에 영은은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노려볼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행동이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것만 같아 견딜수 없다.
"이보세요!함부로 말하지 말아요!당신이 누구든...
참 듣기 저속하네요."
그는 영은의 갑작스런 대꾸에 약간 당황한것 같았다.
"영은아!저애 좀 취했어.말상대하지마라.어서 가자.응?"
"뭐...?그래.영은이.영은이라고 했지?그런 넌 좀 고상하니?
너 잘난체 하지마.나도 너처럼 눈에 뵈는게 없을때가 있었지.
넌 좀 다르니?하...웃기지마.어린애들이 더 무섭더라.야..."
"그만해라,좀!"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듯 거칠었다.
그러나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영은은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두렵다.
"민재!너 사람 웃기게 만들지마.나...너한테 잘못한거...그래.너
...사랑해서 미안해.미안한데 그래도 넌 나한테 이럼 안돼.너.."
그는 더이상 여자를 말릴 기력도,여자의 말을 들어줄 마음도 없는지
영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여자를 지나쳐버린다.
두사람의 뒤에서 여자가 소리지르듯 말했다.
"내가 누구냐구...?나 민재랑 같이 살아.
그남자랑 같이 산다구.알어?너도 정신 차려.알겠니?"
여자는 영은에게 말하는것 같았다.
순간 영은은 우뚝 멈춰섰다.
그는 영은을 보지 않는다.
영은이 말했다.
"사실이에요...?"
"영은아...!"
"날 ...얼마나 더 바보로 만들 작정이었어요?네...?"
"영은아!그건..."
"왜요?오해라구요?"
"그래.그건 좀 달라.지금 저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영은은 그가 한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왜 그는 전부 오해라고,모두 다 지난 얘기라고...
여자의 말은 귀에 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주지 않는걸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
영은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사실이 어쨌든 그녀를 뿌리치지 않았던 그의 행동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것 같았다.
여자의 존재보다 그의 행동에 영은은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늘 이렇게 영은을 초라하게 만든다.
긴 설명도,구차한 변명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여자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얘하고는 어디까지 갔니...?'
자신을 어린애라고 말하던 여자.
여자의 눈에 영은이 그리 보였던걸까...?
아니면 여자는 자신을 어린애로 여기고 싶었던걸까...?
그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여자와는 이미 끝이 난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와 여자는 아직도 진행중이란 말인가...?
"저 여자랑 ...헤어진거 아니였어요?"
"...난...헤어졌어..."
애매한 그의 대답에 더 화가 난다.
"그럼 저 여자는요?저 여자랑 확실히 헤어진것도 아니면서...
그럼...난 뭐예요?난 당신한테 뭐였어요?"
"이러지마.영은아!난 네가 다른 애들이랑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어.
네가 다시 날 찾아왔을때...그때 날 이해한줄 알았는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금 나에게 따져 묻는걸까...?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그럴거라면 왜 다시 자신을 찾아왔냐고 지금 화를 내는걸까...?
..............
영은은 갑자기 할 말이 없다.
그의 말이 맞다.
처음부터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잡지도 않는 그에게 먼저 달려간것도 자신이었다.
자신을 이해해달라고,그런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그는 말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의 여자라고 영은에게 소리치면서도 그의 등뒤에 서서
그를 불러세우지 못한 여자가 생각났다.
여자도 이런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서 완전한 그의 여자가 되지 못한걸까...?
영은은 그의 여자중 한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얼마전 자신을 떠올렸다.
아니야.그건 진심이 아니었어.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던거야.그것뿐이었어.난...아...!
영은은 믿을수 없다.
이순간 자신의 모습.
그것은 조금 전 두사람의 뒤에 남겨진 여자와 다를게 없다.
그가 말했다.
"영은아!넌 다른애들이랑 틀려.나한테는..."
더이상 그의 앞에 서 있을수가 없다.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길가에 나와 서있는 두사람 앞에 멈춰섰다.
영은은 그에게서 도망치듯 튕겨져나와 얼른 차에 몸을 실었다.
다른애들...?
그래.나도 어느새 그의 여자들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던거야.
자신의 것인양 사람들의 앞에서 그를 꼬옥 끌어안던 여자의 보이지
않던 슬픔이 자신에게로 전해져 오는것만 같다.
영은의 귀에다 대고 그녀가 말했다.
'넌 좀 다르니...?넌 좀 고상하니...?정신차려.정신차려.정신...!"
기사아저씨의 돌아앉은 등이 그의 것만 같다.
그의 등을 보고 있는 영은은 가슴이 아파 견딜수가 없었다.
영은은 자신에게 묻는다.
'친구고 뭐고 다 버리고 네가 얻은 사랑이 고작 이런거였니?
네가 바라던 사랑이 겨우 이런거냐고...?'
영은은 뒤를 돌아본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영은의 입으로 말했다.
'사랑해서 미안해.사랑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