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이유"
골목을 들어서는 입구
우체국앞에서 영은은 핸드폰을 켜본다.
짧은 신호음과 함께 깜박이며 기지개를 펴는 그녀의 전화기.
필요없다는 영은에게 머리까지 쥐어박으며
"너 쓰라고 주는거 아니다.내가 쓸려구 그런다.들어오라면
언제고 기어들어오라고...팔 아퍼.자!얼른 받아라"
지원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며칠이고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자
애가 탄 그녀의 어머니는 통 발걸음하지 않던
그녀의 화실로 찾아왔다.
목욕을 하고 오는길에 시장통에 들러
속옷과 편한 바지를 살 참이었다.
시장통에서 생각지도 않게 어머니를 만나자
영은은 반갑기도하고
서럽기도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화실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갈려던 차에
길 건너편에 서있는 영은을 발견하자 어머니는
그녀를 부르는 대신 신호도 보지않고 달려와
어깨를 있는 힘껏 툭툭하고 때리기만 하셨다.
영은의 마른어깨가 길가에 서있는 떡집간판처럼 앞으로 뒤로
소리없이 흔들린다.
엄만 신호도 안보고 그렇게 뛰어오면 어떡해.큰일날려구.
어머니의 헝컬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영은의 가슴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 못된것!에미 속 까맣게 태워놓고 너는 니 할짓 다 하고
다니는구나.이 못된것.이못된것..."
아마 어머니는 이미 지원과의 일을 알고 있는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영은에게 뜨거운 국밥 한그릇 사먹이고나서
가방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채 그렇게 가버렸다.
그래요.엄마.난 어쩜 이렇게 나밖에 모를까?나 왜이렇게 나쁜앨까?
영은은 자신이 사준 것도 낭비라며
한사코 취소하라,싫다 실강이를 벌이며 서로 고집을 피우는통에
이제는 구식이 되어 책상서랍속에 던져져있을
몸체 큰 핸드폰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삼켰다.
엄마!나 조금만...그래.조금만 더 엄마한테 나쁜딸 될께.
나 그 사람 포기가 안돼.내마음 닿는 끝까지 한번 가볼래.
미안해.오래 걸리지 않을거야.조금만 기다려줘요.네...?
참으로 오랜만에 영은의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한방울
뚝하고 핸드폰위로 떨어졌다.
영은은 계단을 내려와 하얀 폐인트칠이 벗겨져나가 녹이 슨
문고리를 한번 돌려본다.
문은 잠겨져 있었다.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걸 보아
아무도 없는것같다.
딱히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온 길이 아니라 영은은
마땅히 갈 데가 없었고 그때 생각난 곳이 이곳이었다.
결혼전 함께 자취했던 혜영의 화실은 영은의 작업장이기도 했다.
얼마전까지도 혜영의 작품전 준비를 도우며 여기서 며칠 밤을 샜다.
영은이 이곳에 오는 날이면 지원은 늘 밤참을 사다 날랐다.
작품전시회를 마친 그녀는 지금 이곳에 없다.
영은은 가끔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결혼후 그녀가 완성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언니!생각나면 언제든 와.김씨아저씨랑 끝내고 오면 난 더 좋고..."
혜영은 늘 함께 살던 때가 그립다며 입버릇처럼 결혼이란걸
왜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진이와 혜영 그리고 영은은 함께 졸업한 과 동기였지만 한살어린
혜영은 영은에게는 꼬박 언니대접을 해주었다.
그러나 진이의 불평처럼 혜영이 진이에게는 그러지 않는건데
혜영의 말로는 영은과 가장 친한척하는 진이의
우스운 질투심때문이라고한다.
속과 겉이 보이는거라면 혜영은 완벽에 가깝게 그 둘이 일치했다.
뒤끝이 없고 단순명료한 그녀의 성격덕에 두사람의 동거는
늘 즐거웠다.그러나 가끔 진이가 놀러라도 오는 날이면
혜영은 눈에 보이게 쌀쌀맞기 그지없었고
영문을 모르는 진이에게
영은은 미안할따름이었다.
진이의 써클 선배였던 민재.
막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이었던 그를 먼저 좋아한건 진이였다.
진이의 질투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혜영은 그런 진이를 늘 못마땅해했다.
영은은 키를 꽂으려다 말고 다시 층계를 오른다.
진이의 집까지 ?아간 지원이 이곳을 찾지 않았을리 없다.
영은은 무엇이 그다지 두려워 그를 피하는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을뿐...
도망치듯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지원을 만나서 어서 자신의 결정을 얘기해줘야겠다고
자신은 아무것에도 상처입지 않았으며
다만 이제서야 자신이 늘 그리던 삶을 살 자신이 생겼다고
힘들게 해서 미안했다고
너무도 고마웠노라고
그리고
당신의 모든것이 잘되길 바란다고 ...
그렇게 그에게 웃어보이는 마지막 인사를 해보이겠다고...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하면서...
영은은 지원에게 여자가 생긴건 그녀가 민재를 다시 찾아가라는
운명의 계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고 싶다.
민재곁에서 늘 맴돌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래도
다시 돌아갈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받은 상처들따윈 기억하지않겠다고 ...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민재에게 상처입은 진이를 안아주며
자신도 상처입을지 모르지만 흐르는 마음을 막지않을거라
다짐하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던 어린 시절 그때처럼
그녀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보리라 애써 움츠려든
자신을 추스려본다.
세상에 늘 자신없어하는 그녀에게 용기를 준 그에게
이제는 그 용기가 되어주고 싶다.
문득 영은은 카페에서 자신을 ?던 젊은 여자의 도도한 얼굴이
떠오른다.
또 자신이 없어지려한다.
그녀는 민재의 누구일까...?
영은은 용기를 내어 이제는
술기운을 빌어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그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영은을 내치던 민재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원망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그녀는 포기하지않으리라 또다시 다짐해본다.
자신을 위해 한평생 눈물흘리시는 어머니.
그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접어준 친구.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비열하지만 정직한 지원의 여자.
이제 자신과 마음의 상처를 서로 보듬어야 할
어쩌면 민재가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여자.
영은은 모습은 다르지만 그 여자들이 다 자신이라는 걸 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물에 젖어있다.
영은은 그녀들을 싱싱하게 말려서 제자리에 가져다놓고 싶다.
그러기위해서라도 그녀는 그의 곁으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