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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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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안개 2001-11-06

"내가 언니땜에 못살아! 이걸 아직도 안 먹었어? 그럼 반찬도 다 버렸겠네!"
혼자선 밥을 잘 먹지 않는다는 걸 아는 수영이가 반찬을 해 가지고 들러서 걱정을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 사 놓고 간 봉지쌀을 보고 하는말이다.
"회사에서 먹고 오잖아.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러거 들고 다니지 마." 곰팡이가 나서 반찬을 통째로 버린 게 미안해서 궁색한 변명을 한다. 하지만 그 애는 안다. 내가 자기 이외에는 어느 누구하고도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걸.
그 애는 입덧으로 가뜩이나 안 좋은 얼굴로 인상을 찌뿌린다.
난 아버지 얼굴도 모르잖아, 그래서 나이든 남자가 좋아.
대학을 마치지도 못하고 자기보다 열네살 이나 많은 학과 조교하고 결혼을 하면서 한 말이었다. 대학이나 졸업하고 결혼하길 바랬지만 나처럼 삼촌에 대한 기억으로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영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 건 내 일생의 최대 목표였다. 물론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건 미련이 남지만 제부가 좋은 사람인 것만은 맞는 것 같아 안심이다. 그 애는 지금 임신 중이다. 올 겨울이면 조카가 생긴다. 수영이와 나 말고 또 다른 핏줄이 있다는 건 부자가 된 것 보다 더 든든하다.
"니 몸이나 신경써, 내가 어린애니?"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고마운 표시를 그렇게 한다.
"내가 올핸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 시집 보낼 줄 알아, 나처럼 애기도 낳고..."수영이가 조금 봉긋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저럴때의 수영이를 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했는데 내 앞에선 항상 밝다. 내 앞에선 울지도 않더니 결혼식 날에는 눈만 마주쳐도 울어서 서로 얼굴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둘 다 눈이 빨갛다.
"언니, 나 애기 가지니까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자꾸 생각 나. 그동안은 언니가 엄마 같았는데..."수영인 말끝을 흐리며 반찬통을 만지작거린다.
엄마 얼굴조차 희미한 가엾은 수영이. 물론 나도 때때로 엄마가 그립다. 그러나 원망하진 않는다. 엄마가 어딘가에서 그저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가끔 우리 생각을 하며 마음 아파하지 말길.

반대편 육교 밑에서 그 남자를 기다렸다. 회사엔 십 년을 넘게 근무해 온 이력답게 조금 늦는다고 양해를 구하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수영이와 둘이 자취하면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나는 그 많은 셋방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회사에서도 누군가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 올 때 기계소리에 섞여서도 오십명이 넘는 사람들을 곡 한번 돌리지 않고 알아낼 수가 있다.
투둑..투둑. 그 남자가 내려온다.
그 남자의 발소리는 한쪽 발이 짧기 때문에 미처 한발이 닫기전에 또 한쪽 발이 올라간다.
육교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 남자는 육교 건너편 어디쯤에서 볼일을 끝내고 올 것이다.
혹시라고 뒤돌아볼까봐 길가에 세워놓은 학원 버스에 몸을 숨겨가며 뒤를 따라갔다. 걸음이 빨라 따라가기가 힘들다.
헤어뱅크를 지나 동원 아파트 앞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린다. 혹 마주칠까봐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뚜..뚜...빨리 카드를 집어넣으라고 전화기에서 소리를 낸다. 파란불이 켜지자 그는 급히 뛰어간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박스에서 나왔을땐 깜빡깜빡 빨간불로 바뀔려는 찰나였다. 성급한 차들은 출발선에서 미끄러지고 있고 뛰어드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크랙션을 울려 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그 남자는 보이질 않는다. 주안역 쪽으로 가는걸 봤는데, 너무 뛰었더니 등에서 땀이흐른다. 온천 목욕탕 앞에 파란색이 보인다. 걸어서 출근을 하는 것이라면 직장이 이 근처인 것 같다. 오른쪽으로 꺾더니 오층짜리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4,5층은 교회건물이고 3층은 속셈학원이다. 2층은 건설분야인지 삼영건설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1층은 신동양 중화요리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