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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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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안개 2001-10-26

물론 그후로 자주 마주쳤다.
어떤날은 육교 올라가기 전에 만났고 어떤날은 육교 건너가서 만났고 또 주택가나 도화초등학교 앞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 남자도 내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매일 마주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법이니까.
난 내 의지에 관계없이 남에게 기억되는 것을 원치않는다. 난 될 수 있으면 적은 사람하고 부딪히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보수도 형편없고 먼지와 냄새 때문에 잦은 두통을 느끼는 신발 하청 업체를 십년도 넘게 다니고 있다. 처음에 내가 그 사람을 피한 건 그 때문이다.
옷차림을 보니 공무원이나 영업부 직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세련미가 있는 프리랜서도 아닌 것 같고 매번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걸 보면 가게문을 일찍 열어야 하는 장사하는 사람인것도 같다.
지금까지 내가 본 그의 옷차림은 항상 한가지였기 때문에 유독 쉽게 기억해 냈는지도 몰랐다. 그는 항상 청바지에 푸른빛이 도는 점퍼를 입고 F자 표시가 엉성하게 눕혀져 있는 비닐로 된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신발공장에 다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 그의 발 또한 짝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천천히 걷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뛰듯이 걷곤 하는데 그때의 그를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가 약간 짧아서 절뚝거린다.
그 남자는 항상 신문을 들고 다니는데 처음엔 집에서 빨리 나오느라 미처 신문을 못 읽어서 회사에 가져가서 읽는 줄로 생각했다.
길거리에선 신문을 읽으면서 사람을 기다린다거나 차를 기다리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처음으로 그를 볼 때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에겐 아마도 아주 평범한 아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같은 차림이지만 그의 매무새는 단정했고 내 곁을 스칠땐 섬유 유연제에서 나는 미모사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까.
물론 며칠 안 있어 내 추측은 곧 사실로 확인될 것이다.

내가 그남자를 피하기만 하다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건 출근길에 지나치는 도화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걸을 때였다.
내가 바쁜 아침시간에 조금이나마 발걸음을 느긋하게 하는곳이 있는데 도화 초등학교 담장옆을 지날때이다. 매일아침 부지런한 선생님과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사물놀이를 연습한다. 박자나 기교는 아직 서툴지만 징소리와 소고 소리가 얼마나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지 비가 오거나 어떤 사정으로 그 소리를 못듣게 될 때는 그날 기분 마저 우울할 정도이다.
아침 일곱시 반부터 한시간 동안 옆 차도가 통제구역이 된다. 그 길을 편하게 걸을때의 기분이란 참 좋다.
그날은 아이들이 담장 구석을 힐끗거리면서 한쪽으로 몰려서 다니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뛰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턱 밑에 제법 거뭇거뭇한 수염기가 있는 몇몇 남자 아이들은 얼굴이 벌개지며 자기네들끼리 눈짓을 교환하기도 했다.
무슨 사고가 났나...
걸어올라 가면서 담장 구석을 보니 파란색 점퍼가 눈에 띄었다. 직감적으로 그 남자라는걸 알았다. 신문지로 바지를 가리고 얼굴이 벌개진 채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남자들이 지나가면 몸을 돌릴테고 여자들이 지나가면 신문을 밑으로 내릴 것이다.
엉겁결에 난 고개를 휙 돌리고 못본체 지나쳤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 묻은 이불 호청이 생각났고 내 가랑이를 더듬던 뜨거운 손이 생각났고 삼촌의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홱 돌렸다. 적당한 흥분제를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그 남자의 손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그 남자에게 던졌다. 내가 던진 돌은 그 남자가 들고 있는 신문을 정확하게 맞췄고 당황한 그 남자가 신문을 떨어뜨렸다.
갑작스런 일에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홱 돌려 담장 뒤쪽으로 뛰어갔다. 몸을 돌릴 때 보니 바지가 아슬아슬하게 엉덩이에 걸쳐져 있었고 앞 지퍼는 열려 있었다.
어른이 지나가니 뭔가를 기대하던 몇몇 아이들이 도망가는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같이 돌을 던졌다.
그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내 손은 너무 꽉 움켜쥐어 손등에 핏줄이 섰고 내 입에선 아까부터 계속 똑 같은 말이 나왔다.
가만히 안 두겠어. 가만히 안 두겠어.
그날 나는 조퇴를 맡았고 내리 사흘을 악몽에 시달려 앓아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