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은 얼마 되질 않는다.
남편이 이삿짐 센터 직원하고 짐을 옮기는 동안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 보았다. 그녀의 베란다에 늘어진 페츄니아는 주인이 없는데도 여전히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그녀가 그림을 주었다.
나보다도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러는 그녀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입덧하는 날 두고 혼자 취재를 떠나더니 봄이 끝나갈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녀가 집에 있는 동안에도 난 그녀의 집에 가지 못했다.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서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들기도 했고 아무래도 그녀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새엄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음식을 만들어다 날랐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내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올만큼 사이가 좋아졌다.
며칠 있으면 이사가요.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서운해하는 내말에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녀가 어머 왜요? 하며 이유를 물어 주길 바랬다. 그러면 그녀에게 말을 했을텐데.
그녀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남편의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우린 요즘 행복해요. 그러니 모두 잊어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난 정말 내가 행복한지 아니면 그녀가 무엇을 못 잊고 사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이를 만나고 온 남편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쩌면, 입덧이 왜 그렇게 오래가? 하고 묻는 남편에게 서운함에 눈물을 보인게 먼저였는지 모른다. 남편은 애 엄마가, 하며 말을 시작했다.
애 엄마가 오래 전부터 일을 하는 모양이야. 내가 갖고 있던 집, 통장 모두 주고 애 양육비까지 주는데 취직을 했다니...
남편은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하는지 한달이면 몇 일 동안이나 애를 할머니 한테 맡겨 둔다는군.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애엄마를 더 생각해서 말을 안했던 모양인데 애 학교도 보내야 하고...
남편이 말하면서 내눈치를 살폈다.
우리가 데려오죠.
한참 후 내가 말했을 때에야 남편은 얼굴을 활짝 펴며 몸조심해, 하고 말했다.
아이 엄마를 직접 만나 말하고 싶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어떤 만화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포경수술은 마쳤는지...갑자기 학부형이 되는 나는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당신이 누구란 걸 알면 안돼.
남편은 아이의 엄마를 만난다는 내게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의아해 하는 내게 아이의 엄마는 날 안다고 했다.
그때 호수에서 봤을 때 당신이 거기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애 엄마가-남편은 전 아내를 지칭할 때 꼭 애 엄마는 하고 말했다.
그녀가 말했단다. 저기 저 여자 맨날 저기 앉아서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누굴 기다리는 것 같진 않은데...
그래서 봤다고 했다. 그 즈음 그녀는 남편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남편의 직장엘 가보라는 어떤 부부 문제 전문의의 강연을 듣고 와서 행사 내내 호수 근처에 있었다고 했다.
애 엄만 한번 주의깊게 본 여잔 안 잊어 먹어. 그래서 친척들이 좋아하지. 정신없던 결혼식장에서 한번 봤는데도 기억해 주니까.
남편이 덧붙였다.
며칠동안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인사라도 하고 가야 할텐데...
짐을 다 실었나 보았다. 남편이 들어와서 빨리 내려오라고 한다. 남편은 마지막으로 그림을 들고 내려갔다.
301호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혹시 이사를 한 후에 그녀가 궁금해 할까봐 이사할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우유가 들어가는 바닥으로 집어 넣었다.
배가 불러오고 아이의 숙제를 봐 주다 보면 난 어쩌면 하루종일 그림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그림을 보고 그녀를 생각할 것이다.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면서.
그림이 흔들리지 않도록 옷장 뒤에 붙이고 바짝 끈을 조였다. 차가 움직이자 배가 움찔한다.
가만히 배를 쓸어 안고 밖을 보았다. 나와 그녀가 살았던 3층에 따스하게 햇살이 비추고 있다. 언뜻 그녀의 집 창에 그림자가 보였다. 남편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차 문을 내리고 그녀의 베란다를 봤을 때 붉은 페츄니아만이 나를 향해 잎사귀를 흔들고 있다. 잘 못 본 것일까.
남편이 걱정스런 얼굴로 괜찮아? 하고 묻는다.
차가 길 맞은편으로 돌아 나올 때 뒤돌아 보니 붉은 페츄니아 위 유리창에 긴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