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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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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안개 2001-09-05

밖은 화창하다.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따뜻해 창에 팔을 괴고 앉아 있다.
어깨가 저리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답답하다. 배를 한번 쓸어본다.
아직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지만 갑자기 세상이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남편은 지금쯤 아이를 데리고 산 중턱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보내주길 잘한 일인지...
아침엔 참기름 냄새 때문에 자꾸만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두 사람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했다. 도시락을 건네주자 남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는 남편은 묵묵히 내손을 꼭 쥐었다.
인스턴트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아이를 위해 햄을 빼고 쇠고기를 갈아 넣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몸이 너무 약해요.
엄마 같이 보이는 산부인과 의사는 정말 걱정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에겐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이 기분좋게 산행에서 돌아오면 그때 말하리라.
초인종이 울린다.
누굴까.
문을 여니 금방 우려낸듯한 커피를 주전자째 들고 그녀가 서있다.
그녀가 먼저 나를 찾아주다니 무척이나 반갑다.
문을 열어 주는데 그녀보다 커피향이 먼저 들어온다. 울컥 구토가 났다.
욕실에서 허리가 아프도록 쓴 물까지 토하고 나오니 그녀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다.
내가 나온 기척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남편보다 먼저 알게 될 것 같다.
내입으로 말을 하려니 부끄럽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맞잡아 졌다. 긴장했을때의 내 버릇이다. 그녀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녀 옆에서 커튼 자락을 만지작 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혹시....." 그녀가 이맛살을 찌뿌리며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이 달아올라 바닥을 내려다 봤다.
기분이 왜 이럴까. 남편과 결혼식도 못하고 같이 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앞에서도 이런 기분이었다.
난 너한테 면목이 없는 사람이다.
다리가 저려 발바닥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때 말없이 한참동안 고개 숙이고 계시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집을 싫어 하는것도, 좋던 혼처 제쳐두고 남편같은 사람하고 결혼하는것도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 처럼 그녀도 무슨 말을 해주었으면.....
그녀는 몸을 돌려 말없이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려다 나를 돌아보고 축하해요, 말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집으로 커피 주전자를 들고 갔다.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선 대답이 없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비트니 문이 잠겨져 있지 않다. 내가 들어가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짐을 꾸리고 있다.
"어디 가세요?" 내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가방에다 소형 녹음기를 집어넣고 카메라 안에 필름을 감다가 그녀가 뒤졸아 보며 씽끗 웃는다.
조금전보다 그녀의 얼굴이 밝다.
"취재가요. 참, 같이 가실래요? 거기 호수가 있는데, 아니 호수가 아니라 연못이에요.
그 근처 대학을 취재하러 가거든요. 설립 된지 얼마 안됐는데 요즘 같은 때 전원 취업이래요. 오늘 돌아 올 수 있을거에요. 나 일하는 동안 벚꽃 구경도 하구..."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한테는 민정이 만나러 간다고 메모를 남겨 놓았다.
몸조심 잘하라던 의사의 말을 잊고 계단을 두칸씩이나 뛰어 내려갔다.
그녀가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현관 쪽으로 차를 돌린다. 그녀의 차가 내 앞에 서자 또 욱, 하고 헛구역질이 났다. 휘발유 냄새가 참을 수 없다.
상가 옆 잔디 위에다 한참을 토하고 돌아섰을 때 그녀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